위대한 패배자들, 그들을 읽는 이유

장크리스토프 뷔송, 에마뉘엘 에슈트, 『13인의 위대한 패배자들』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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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패배자들에 대한 책은, 승자들에 의한, 승자에 관한 책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적지 않다. 그런 책들은 패배자들을 그냥 패배자라 하지 않고, 꼭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장크리스토프 뷔송과 에마뉘엘 에슈트의 책도 그렇다). 그런 수식어는 역사 속의 패배자들을 달리 볼 수 있다는 강력한 암시인 셈인데, 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에서 유필화의 『위대한 패배자들』까지 다 그렇다.


그런 뻔한 암시임에도 불구하고, 패배자들에 대해 읽는 것은 매력적일 때가 많다. 소수적 감성이랄 수도 있고, 승자의 기록에서 벗어나는 시각 교정의 계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깊이 접하지 못하던 인물, 혹은 오해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관점을 달리 했을 때 보이는 역사의 또 다른 진실(과연 그런 게 있기나 싶지만)에 눈 뜰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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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크리스토프 뷔송과 에마뉘엘 에슈트는 열세 명의 패배자들을 소환하고 있다. 사실 우리말 제목에서도, 원제에서도 ‘위대한’이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과연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인물도 없지는 않다(이를테면, 몬테수마 2세라든가, 장제스, 리처드 닉슨 같은 인물들이다). 또 프랑스 저자들이다 보니 앙리 드 기즈, 콩테 대공, 프랑스아 아타나즈 샤레트와 같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들도 소환하고 있다. 그래서 다소 낯설면서도 ‘잊혀진 패배자들’이라는, 묘한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것도 사실이고, 이름만은 알려져 있으면서도 어떤 성격의 인물이었는지, 그가 어떤 활약을 하고, 어떤 패배를 했는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통해 승자만의 역사가 아닌 패배자의 역사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가장 대표적으로 카이사르에게 패한 갈리아족의 베르킨게토릭스의 이야기가 그렇다).


저자들의 시각은 패배자들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럴 것이라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길을 걸어간 이들도 있었고(한니발이나 로버트 리가 그렇다), 허세라든가 자만으로 패배의 구렁텅이라 빠진 인물도 있었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성격 탓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역사 속의 승자 리스트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기도 했다. 과도한 열정이라든가, 순진한 자긍심(체 게바라를 지목할 수 밖에 없다)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 사실만을 지목하지 않는다. 과연 그 반대의 성격을 가졌으면 승자가 되었을까? 패배자들은 패배했기에 그들 패배의 원인을 지적받는 셈이다. 패배가 그들의 죄가 아닐까?


또한 저자들은 패배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미래의 시제를 쓰고 있다. “이제 그는 볼리비아 원주민 장인들이 만드는 수공예품인 ‘아바르카’라는 신발을 죽을 때까지 신을 것이다.”라는 식이다. 역사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인데, 미래 시제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패배는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패배자임에도 숭배받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는데, 한니발이라든가, 잔 다르크, 로버트 리(그에 관해서는 다른 이보다 더 큰 논쟁이 없지 않지만), 체 게바라 같은 이들이다. 그들의 생애, 특히 패배에 이르는 과정이 장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패배에 덧칠해진 문학적 수사가 숭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승리도 패배도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중요하다. 한니발, 잔 다르크, 로버트 리, 체 게바라의 패배는 그렇게 패배한다면, 그 패배를 잘 설명해줄(혹은 잘 윤색해줄) 작가를 만난다면, 그렇게 패배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역시 그런 패배는 드물기에,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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