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의 달이 뜨는 밤, 처칠과 히틀러, 루스벨트

에릭 라슨, 『폭격기의 달이 뜨면』

by ENA
XL.jpg


돌이켜보니 이상하게도 처칠에 관한 책을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히틀러나 스탈린에 관해서는 꾸준히 읽어왔음에도. 히틀러나 스탈린에게서 받는 인상이 더 강렬(?)하기야 하지만,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따지자면 처칠도 못지 않을 것 같은데도 그랬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3거두 회담을 다룬 『얄타』에서도 스탈린과 루스벨트를 중심으로 쓰고 있지 처칠은 뒤로 밀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처칠이 그렇게 취급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를 읽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IMG_KakaoTalk_20220314_113959838.jpg



에릭 라슨의 『폭격기의 달이 뜨면』에서 주인공은 분명히 윈스턴 처칠이다. 1940년 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끊임없이 밀리고 있었다. 책은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으로도 전쟁을 막지 못한 체임벌린은 총리직에서 사임을 하고, 영국 국왕 조지 6세는 처칠을 버킹엄궁으로 불러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처칠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총리에 취임했지만(이 표현은 BTS가 맨처음 쓴 게 아니다!) 영국은 풍전등화였다. 덩케르트 퇴각 이후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폭격기의 달’은 독일 공군의 폭격을 의미했다. 야간 공습은 달빛에 의지해서 이루어졌고,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과 같이 밝은 달, 이른바 ‘폭격기의 달(bomber’s moon)’이 비추는 밤에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에릭 라슨은 1940년과 1941년에 이르는 독일 공군의 영국 공습을 배경 삼아 그에 응전했던 처칠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조망하고 있다.


히틀러는 영국이 포기하기를 바랐다. 더 이상 자신들에 대항하는 것은 피해만 늘일 뿐이므로 상황을 인정하기를 원했다. 그 상황이란 유럽 대륙에서의 독일 지배를 의미했다. 괴링은 자신이 지휘하는 폭격기 루프트바페로 영국과 처칠을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괴벨스는 그를 응원하고, 처칠을 조롱했다. 처칠은 의지를 불태웠고, 연설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북돋웠지만,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미국뿐이었다. 어떻게든 미국을 전쟁에 발을 담그도록 해야 했다. 마치 아닌 척했지만,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처칠은 피해 지역에 나타나 위로했고, 다시 의지를 불태웠다. 독일의 입장에서 처칠은 아마도 또라이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이 정도면 포기할 만 한데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랬을 것 같다. 처칠과 영국 국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버텼다. 결국 루스벨트의 세 번째 대통령 당선과 함께 미국의 영국 지원이 현실화되었고, 히틀러는 소련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전쟁의 결과는 다 아는 바다.


에릭 라슨은 이 큰 줄기의 이야기에서 이제까지 다른 책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포함시켜 그 시기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에 보여주었던 처칠의 강철 같으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인물들, 특히 그의 딸 메리와 며느리 파멜라의 이야기는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전쟁 중에도 개인은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전쟁을 이끌고 있는 이의 가족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총리의 비서로 자세한 일기를 남겨(중대한 보안 위반이 될 수 있었지만) 후대에 처칠의 면모를 실감나게 알려준 콜빌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처칠의 비서이기도 했지만,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총리 비서가 아니라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하고자 했던 인물이기도 했지만, 전쟁 중에도 연애 감정을 불태우며 고민했던 청년이었다. 비버브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처칠의 친구이자 언론사 소유주였던 그가 항공기 생산부 장관으로 공군을 비롯한 다른 부서와의 다툼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은 영국이 어떤 식으로 독일과의 싸움에서 버텨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또 하나, 히틀러가 아니라 괴링과 괴벨스, 헤스를 중심으로 독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IMG_KakaoTalk_20220314_113959838_01.jpg



원제의 의미가 궁금했다. “The Splendid and The Vile”. 대단히 멋지다는 뜻의 ‘splendid’와 그 반대로 극도로 불쾌하다는 뜻의 ‘vile’이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일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검색해보고 나서야 이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았다. 처칠의 비서 존 콜빌의 일기(나중에 『권력의 주변』이라는 제목으로 일부를 간추려 출판했다고 한다)에 나오는 문장인 “Never was there such a contrast natural splendor and human vileness.”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독일 폭격기의 공습으로 불타오르는 런던의 하늘을 보고 쓴 글이다. 어떤 의미인지 이제 선명해진다. 메리의 일기에도 그런 느낌의 글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그 겉보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다. 전쟁은 추악한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르스나르와 스가 아쓰코, 겹쳐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