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으니 정치 소설이면서, 또 그것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풍자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그러진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으니 디스토피아 소설이면서, 결국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비참한 나락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지금 봐서는 1949년도 아득하지만, 1984년도 아득하다.
1984년이 되었을 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이 소설의 세계를 비춰주었던 게 떠오르지만, 그 해를 지금 기준으로 ‘현대’라 부르기는 꺼려진다.
조지 오웰은 1940년대에 1980년대를 까마득한 미래로 봤을지도 모르고, 혹은 한 세대만 건너면 다가오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여겼을른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먼 미래로 생각했지만 그리 멀어지지 않은 미래가 되어버린 것이라 여겼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실제로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 미래를 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라야 당대의 현실에서 이어질 미래였을 것이다.
소설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아주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그는 미숙했고, 너무 순진했다. 그리고 결국 빅 브라더의 세계에 굴복하고 만다. ‘지구 최후의 남자’라는 것은 그에게 훈장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빅 브라더의 세계 속에 아주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니(혹은 사라져 간다는 것이니), 이건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얘기다.
조지 오웰은 당시 폐결핵으로 투병 중이었고, 당시에 폐결핵은 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이었다. 그러니 소설의 이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결말은 그의 이런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일까?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윈스턴 스미스처럼 절망에 그쳐버리고 말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극복의 전제 조건이다. 조지 오웰이 감춰 놓은 결말은 윈스턴 스미스 이후에 살아가야 하는 『1984』의 독자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