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고통 받는 와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제목부터 시의적절한 소설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부터 집필하고 있었고, 소설이 나온 이후에야 팬데믹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보면 그가 놀랄만한 예언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은 언제고 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이런 식으로 전 세계가 동시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많지 않았겠지만). 소설가로서 그는 강력한 재난 앞에서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난으로 전염병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재난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제한된 공간에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그렇게 했을 때 재난은 증폭되고, 사람들은 본성을 드러내며, 사회는 인간의 본성에 여지 없이 휘둘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1901년 ‘유럽의 병자’로 불리며 기울어가는 제국 오스만의 한 섬 민게르 섬에서 일이 벌어지며, 그 섬은 고립되고 만다.
민게르 섬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정확히는 그리스정교)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페스트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방역 전문가인 기독교인 본코프스키 파샤를 파견한다. 그러나 그는 몇 일 지나지 않아 거리의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어 민게르 섬으로 파견된 이는 자신이 폐위시키고 감금한 자신의 형이자 전임 황제의 셋째 딸 파키제 술탄과 그녀와 결혼시킨 이슬람교인 의사 누리였다. 그들은 의화단 사태로 혼미한 중국에 특사로 파견되어 가던 중이었다. 파키제 술탄은 결혼 전까지 하렘에 갇혀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사실 왜 황제가 자신과 자신의 남편을 중국으로 가는 배에 태웠는지 영문도 모르고 있었다.
부마 누리는 민게르 섬의 총독 사미 파샤와 함께 엄격한 방역 조치를 시행하지만 정부의 체계는 허술했고, 주민들은 그 방역 체계를 의심하며 따르지 않았다. 결과는 방역 실패였고, 사망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만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은 섬을 봉쇄하기 위해 전함을 보내고, 이스탄불도 그 압력을 굴복하여 섬의 봉쇄에 동참하고 만다. 민게르 섬은 본국에게도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버렸고, 자력으로 페스트를 극복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그 일들은 의도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우연적 사건이 필연처럼 받아들여지고, 필연은 다시 여러 우연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모든 역사가 그렇고, 소설은 역사가 그러함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오르한 파묵의 이 소설은 매우 정교하다. 가상의 섬이며, 가상의 역사이지만, 실제의 섬처럼, 실제의 역사처럼 여기게 만든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실제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런 역사 속에서 동지중해에 떠 있는 한 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사건이 필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우연적인 사건들을 우연적으로만 그리고 있지 않는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아귀가 맞으며, 또 먼 훗날의 운명과도 연결되어 있다.
오르한 파묵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이 소설을 완성시켰음에도 이 팬데믹이 어떻게 악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통찰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읽으며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1901년 버림받은 한 섬의 풍경이 21세기 세계 곳곳에서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대의 징조를 느낀다고 했었다(황지우). 소설가는 역사를 현재처럼 그린다. 현재를 역사처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