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 교양서 저자 중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관점을 가장 좋아한다. 그가 쓴 책은 다양하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일관된 시각은 “과학은 필수 교양”이라는 것이다(그가 쓴 책에는 『또 다른 교양』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과학한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지만). 인류가 탐구해온 과학 지식의 흐름을 간략하게 짚고 있는 『과학은 미래로 흐른다』도 마찬가지다. 교육이란 그 사회의 문화가 드러나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연과학의 진보보다 이 문화와 세계관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252쪽)
현대의 문화와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과학을 나는 몰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거나 과학에 대한 혐오감을 갖는다는 것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종주의 같은 멍청한 생각(피셔의 발언이다)과 같이 과학을 왜곡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는 현대의 교양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과학의 흐름으로 일곱 가지를 고르고, 그것을 이 책에서 짚어 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양으로서 과학을 퀴즈에서 이론의 제목이나, 사람 이름을 맞추는 것쯤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연선택의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의 이름이 찰스 다윈이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왔는지, 그것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이후의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바로 그것이 교양으로서의 과학이라는 것이다(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피셔는 다윈의 사고가 생물학에 ‘확률’이라는 사고법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빛과 에너지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이 어떻게 아인슈타인에 이르게 되었는지, 아인슈타인의 빛과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쓰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로 한꺼번에 지구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식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생각이 어떤 시점에서 나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으며, 그런 생각의 철학적인 의미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현대의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강조하지만, 과학이 역사와 맺는 관계에 대해 무지하지 않으며, 또한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보여준다. “역사의 변혁”이라는 장에서는 언어를 통한 인지 혁명의 과정과 의미,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를 통한 정신과 물질 사이의 관계,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에 인류 지성의 폭발과 한계, 12세기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교육 혁명,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유사성과 차이점, 계몽주의 시대의 도래, 그리고 현대까지 장대한 인류의 흐름을 짧지만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예술을 위한 시간, 혹은 과학에서 진리로”에서는 과학이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매우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똑같이 색채론, 혹은 광학을 연구한 뉴턴과 괴테를 비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비슷할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서로 보완적인 게 될 수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뉴턴은 부분을 봤지만, 괴테는 전체를 보았다. 괴테는 보는 행위를 관찰했지만, 뉴턴은 빛을 분석했다. 괴테는 무지개나 수면의 기름 막 위에 생기는 색 같은 광학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뉴턴은 색채 현상이 인간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 말할 게 별로 없었다. 괴테는 예술을 위한 이론을 지향했고 그림에 나오는 색들의 조화를 이해하려고 했던 반면, 뉴텅느 빛이 거리를 극복하고 장애를 만났을 때 이 빛이 지나는 길을 이해하려고 했다. 뉴턴은 빛이 사람의 눈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고 싶었고,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괴테는 빛이 자신의 눈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기를 원했다.” (258~259쪽)
이 책은 짧다. 그러나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과학의 진리를, 그것을 깨우쳐온 우리 인류의 지성을 도도한 흐름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