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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넬라 (Legionella) 1.

냉방병 혹은 레지오넬라증

by ENA

내가 처음 연구한 세균은 레지오넬라(Legionella)였다. 박사 학위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한 첫 주제가 바로 레지오넬라였는데, 당시에는 이 세균과 관련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일반인 수준과 다를 바 없었다. 이른바 여름철 냉방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이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레지오넬라균이 냉방병의 원인이 된다는 얘기에는 좀 설명이 필요하다. 냉방병이란 여름철에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냉방에 노출되었을 때 가벼운 감기나 몸살, 권태감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냉방병이라는 게 어떤 특정 질병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을 통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냉방병 가운데는 감염 없이 그저 신체 기능이 저하된 상태일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하게 냉방 환경을 개선하고 좀 쉬면 낫는다. 간혹 레지오넬라라는 세균에 감염되어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이 경우를 레지오넬라증이라 한다. 그러니까 레지오넬라균이 냉방병의 원인균이라는 것은 틀린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레지오넬라균이 왜 냉방병의 원인균처럼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건 레지오넬라의 생존 환경과 함께 이 세균에 감염되는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레지오넬라는 주로 물에 서식한다. 냉각탑, 상수도 등에 서식하면서 냉방장치의 가동과 함께 공기 중으로 퍼져 감염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또한 여름철 물놀이 시설에서도 감염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여름철 냉방과 관련되어 감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냉방병과 연관되어 언급되는 것이다.


레지오넬라균이 발견된 상황 역시 냉방과 관련이 있다. 이 세균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건 1976년으로 다른 병원균에 비해 최근이라고 할 수 있다. 레지오넬라증은 우리말로 재향군인회병이라고도 불리는데 사실상 둘은 같은 이름이다. 왜냐하면 레지오넬라에서 Legion이 재향군인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1976년 7월 미군 재향군인회(American Legion) 지부 모임이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열렸는데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호흡기 질환이 번졌다. 221명이 감염되고 34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굉장한 관심과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원인균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CDC를 중심으로 대규모 조사가 이뤄졌고, 1977년 1월에 이르러서야 이 세균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이 세균이 바로 레지오넬라 뉴모필라(Legionella pneumophila)다. 제대 군인들을 희생시키면서 세상에 존재를 알린 세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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