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Middle East)에 관한 뉴스는 언제나 자극적이다. 테러와 전쟁에 관한 뉴스가 대부분이고, 혹은 인권 유린과 여성 차별에 관한 뉴스들도 빈번하다. 어릴 적부터 팔레스타인(혹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 이란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이라크 전쟁 등등이 중동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중동을 잘 모른다. ’중동‘이라는 표현 자체가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다(정확한 표현은 ’서남아시아‘가 맞다. 한반도의 위치가 극동(Far East)가 아니라 동북아시아가 맞듯이).
아시아 대륙의 반대편에 있는, 그래서 별로 교류도 없는 것 같은 중동(혹은 서남아시아)에 관해서 잘 몰라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잘 몰라도 되는 걸까?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로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가 휘청이는 상황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걸까? 중동의 정세로 석유값이 요동치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몸살을 앓는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성은 강해지고 있다. 우리가 중동을 알아야, 이해해야 할 필요는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중동의 역사에 대한 책도 늘었고, 그 책들 중 일부는 읽은 바도 있다. 대표적으로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세계사를 읽는 관점 자체를 이슬람 쪽으로 돌렸을 때 어떤 세계사가 펼쳐지는지를 보여준 좋은 책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성 학자의 책은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중동의 역사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데이비드 프놈킨의 『현대 중동의 탄생』은 현대 중동의 문제가 비롯된 서구의 무식하면서, 무자비하면서, 욕망에 찬 선긋기에 관해서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현대 중동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에 좋은 책이었다.
그에 비해 『중동은 왜 싸우는가?』는 우리나라 저자가 중동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결과를 보여주는 책이다.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가 탄생하고, 이슬람 국가가 성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리아 내전까지 중동의 21개의 장면을 통해서 중동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현재의 중동 문제가 바로 그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오스만 제국의 흥망성쇠와 개혁의 실패, 서구 열강의 땅따먹기 경쟁과 비겁한 약속 어기기, 아랍 유력 가문들의 욕망, 유대인 국가의 기획과 탄생으로 말미암은 갈등과 전쟁, 아랍 민족주의의 발흥과 패배, 이슬람 근본주의의 탄생과 성장, 이란의 이슬람 혁명에 이은 이란-이라크 전쟁의 발발, 쿠르드족의 방황과 투쟁, 그리고 알 카에다의 테러와 시리아 내전. 이 모두가 하나의 궤로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모두가 중동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가 현대 중동의 문제에 어떻게든 관계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중동에서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요약해서 얘기하자면, 저자는 ’정체성‘의 문제를 들고 있다. 정체성이란 나,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지하는 것인데, 그렇게 인지된 정체성은 나와 우리의 소속을 정하면서 동시에 누구를 배제할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중동은 바로 그 정체성이 국가의 경계와 매우 불일치하다는 문제가 가지고 있다. 한 국가에 수니파와 시아파가 공존한다든지, 누구도 서로 다른 나라로 쪼개질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지역이 영국, 프랑스 등의 사정에 따라 여러 국가로 분리되었다든지, 쿠르드족 같은 경우엔 지역적으로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음에도 여러 국가에 나뉘어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라든지 등등. 중동의 국가들은 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지금도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그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또 한 가지는 중동의 이슬람주의의 발흥과 관련한 시각도 잘 음미해야 할 것 같다. 중동의 이슬람주의는 단순한 종교적 광신주의가 아니라고 평하고 있다. 여러 국가, 혹은 지역에서 시도했던 근대화 모델이 실패하고(대표적으로 이집트, 이란, 시리아 등),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슬람주의다. 근대화 기획이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이어지고, 경제 성장은 이루지 못하고, 부의 불평등과 부정부패가 심화되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권력은 무너지고 말았다. 중동은 무함마드 이래 국가와 종교가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종교공동체가 확장되어 국가로 발전) 성장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으므로 실패한 근대화 기획의 대안으로 그 성공의 역사를 소환했다는 것이다. 서구의 제도와 사상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종교로부터 해결책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중동은 왜 싸우는가?”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중동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처럼(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싸우기만 한다는 인식 역시 잘못된 것일 터이다. 하지만 현대 중동의 복잡함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답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먼 나라에 대한 이해는 또한 그곳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야기하듯, ’한국만 아는 사람은 한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