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 이 나이가 되면 뭔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었을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여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해서 좋아질 거라 생각했었던 거 같기도 하고, 무엇을 벌여나가기보다는 정리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달라질 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변화는 분명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딸과 아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역할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건 정말 중요한 변화이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변화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다른 사람에 비추어 나의 변화를 생각하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진정한 변화라고 한다면 나 자체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십이 되고, 정말 무엇이 달라졌을까?
실은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나이 오십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박균호의 『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를 읽으면서 말이다. 굳이 ’오십‘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독자층을 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제목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용도 나이 ’오십‘이랑은 큰 관련이 없다. 책을 관점을 가지고 깊게 읽어야 한다는 게 이 책 전체의 취지이니 말이다. 그게 나이랑은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돌이켜 생각해보게 된다. 그냥 오랫동안 책을 꾸준히 읽어왔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에 따라 읽게 되는 책들이 달라져 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른다.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이라 불리는 책들도 많이 읽었지만, 소설, 시집, 그리고 문학이론 서적들도 많이 읽었다. 그러다 생계에 대한 부담이 있던 시절에는 내가 책에서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 소설과 시집을 여전히 읽고 싶었지만, 내가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논문 읽기도 빠듯한 시간에 시간을 내며 읽는 책이 내가 분명한 무언가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조금씩 폭이 넓어진 건 십여년 전부터다. 그리고 오십이 되어서는... 그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이게 오십이라는 나이와는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상황 때문에 책을 들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뿐인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짧게 떠올려본 나의 독서 이력은 그렇다.
사실 며칠 전 오래 전에 썼던 글(일기)을 읽은 일이 있다. 책 읽은 소감이 주를 이루는, 말하자면 독서 일기인 셈인데, 93, 94년에 썼던 일기에 2004년에 그에 대해 소감을 덧붙여 놓았었다. 2004년에 소감을 덧붙이면서 용케도 타이핑을 해두었었다. 얼굴이 화끈거림을 무릅쓰고 읽었다. 보니 20대 때의 생각이 30대 때 달라졌음을 그렇게 많이 토로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건 20대 때의 설익은 생각이 아니라, 30대가 되어 20대 때의 생각을 설익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그때도 젊었었다. 그러면서 지금 책을 읽으면서 하는 생각들이 나이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 읽게 되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나는 오십이 되어 이전과는 다르게 책을 읽고 있다.
(굳이 ’오십‘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이 책은 책에 대해 쓰고 있다. 꼭지마다 줄기가 되는 책이 있고, 그 책을 (다르게?)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 있다. 이를테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가 있고, 함께 알렌의 『1929, 미국대공황』이라는 책이 있어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을 읽는 데 미국대공황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조제 사라마구(나는 주제 사라마구로 되어 있는 책으로 읽었는데...)의 『수도원의 비망록』에는 최형걸의 『수도원의 역사』를 덧붙인다. 그러니까 박균호 씨는 『수도원의 비망록』을 수도원이 했던 역할과 권력과의 관계, 그리고 그 아름다운 수도원이 지어지기까지 바쳐졌던 수많은 목숨과 관련하여 읽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역사 소설이면서, 사회 비평서이면서, 사랑 얘기로 읽었는데, 사실 주제 사라마구의 역사적 상상력을 따라가기에 벅찼다.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고전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위스키와 관련지어 읽기도 하고, 『이별의 순간 개가 전해준 따뜻한 것』, 『세상이 멈추면 나는 요가를 한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등 어쩌면 조금은 가벼운 주제를 다룬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책읽기에 관한 책에서 개라든가, 요가, 다이어트, 그리고 호텔 같은 얘기를 하는 건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아, 오십이 되면 그런 주제도 깊이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지점이다(다시 말하지만, 오십이 되어야만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책을 깊이 읽기 위해선 단지 그 책만 가지고는 쉽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깊이 읽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어 좋았다. 그런데 사실 더 좋은 것은 책을 읽는 데 한 가지 관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이를테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는 데 ’요리‘를 가장 앞에 두고 읽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구나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는 금서의 역사와 관련해서 읽을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성 해방과 관련해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하게 읽는 수 있는 것. 그것은 책 읽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권한 같은 게 아닐까? 이 책은 그런 걸 깨우쳐준다. 그래서 계속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