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플렉스너,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
미국 의학 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 개혁을 앞장섰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초대소장이었던 에이브러햄 플렉스너는 1939년 10월 <Harper’s>지에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The Usefulness of Useless Knowledge)”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1921년 교육위원회에서 작성했던 메모에서 비롯된 이 글은 “우연한 발견에 힘입은 인간의 호기심”이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진보적 기술의 강력한 힘이라는 것 자신의 지론을 밝히고 있다. 진정학 혁신가는 마르코니가 아니라(“마르코니는 누구든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헤르츠와 맥스웰이며, 마이클 패러데이, 프리드리히 가우스, 군론(group theory)를 창시한 수학자들,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울 에를리히 등이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지적 활동의 쓸모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당시 시대상에 대한 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상황에 대해, “인류의 진짜 적은 인간의 정신이 날개를 펼치지 못하도록 틀에 가둬 주조하는 사람이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물론 독일과 이탈리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플렉스너의 생각은 그대로 강의 없이 자유로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설립과 활동으로 이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부터 8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인 로버르트 데이크흐라프는 플렉슨의 에세이를 이어 쓰고 있다. 제목은 <내일의 세계>. 플렉스너의 생각을 요약하고 반추하며, 현재 순수 학문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미국의 상황을 얘기하고 있지만, 미국만이 아닐 뿐더러 그나마 나은 곳이 미국이다)을 개탄하고 있다.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이 1969년 의회 청문회에서 입자 가속기의 쓸모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이 나라를 지킬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답변이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내일의 세계’를 위해서 지금 당장 쓸모에 집착하여 순수 학문(이 구분에 대해서도 노벨상 수상자 George Porter의 말을 빌어 ‘응용된 연구’와 ‘아직 응용되지 않은 연구’로 나누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이 위축되고 쇠퇴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시에는 ‘소년들의 물리학’이라 불리며 이론적 탁상공론으로 비춰졌던 20세기 초반의 양자역학만 봐도 그렇다. 지금은 미국 국민총생산의 30%가 양자역학에 의해 탄생한 발명에 기초한다. 그렇게 따지는 것도 사실은 이런 논의에서도 조금 불경스러운 것이긴 하다.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에 기초한 학문 활동의 가치는 그 자체로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가끔 내가 하는 과학 활동이 아마츄어스럽지 않은지 생각하곤 한다. 그런 생각은 스스로 어떤 경우엔 부정적이고, 또 어떤 경우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 직업인데, 프로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 비판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무엇을 좋아해서 한다는 의미에서 아마츄어리즘(amateurism)이야말로 과학에서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일 년에도 수차례 작성해야 하는 연구계획서와 보고서에는 ‘활용 방안’ 또는 그 비슷한 것을 쓰는 부분이 있다. 과학자들이 가장 곤란해 하는 부분 중 하나다(아닌 이들도 있을 테지만). 나는 ‘정복’ 같은 말까지는 쓰지 않지만, ‘획기적 전환’ 같은 말을 쓰긴 한다. 단 3년 만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구를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겠지, 아니 그럴 수 있는 데에 조금의 기여라도 할 수 있겠지 하면서 그런 말을 쓸 수 밖에 없다. 쓸모없는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인상은 주지 않기 위해서. 쓰는 사람도 그렇지만, 읽고 평가하는 사람도 이해하겠지 생각하면서.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해서 상황이 쉽게 바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당장 쓸모가 눈에 띄지 않는 연구를 한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는 것 정도의 위안은 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 책 좀 읽어보라고 할 수는 있다. 조금씩 바뀌길 기대하면서.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959176?art_bl=12555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