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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일본 읽기

이창민, 『지금 다시, 일본 정독』

by ENA

과연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 어떤 관계이든 객관적이라는 말은 수사에 그칠 때가 많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일본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서 평가하는 이면에 이미 상당한 주관성이 들어가 있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의 한 마디, 장관의 행동 하나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일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일제히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뉴스는 그런 흥분을 자제시키는 방향보다는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제목을 내세우고,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극단을 치달을 때가 많다. 이를 비웃으며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쪽도 있다.


사실 일본과의 관계에 완전히 냉정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기도 하지만, 나는 더욱 그렇다. 솔직하게 말하면 일본의 행태와 상황에 대단히 부정적이지만, 앞으로 일본이 침몰하기를 기대하고 바라지 않는다. 그건 어떤 대의나 국제 관계에 기초한 바람 때문만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 보다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를 느낀다(완전히 냉정해질 수 없다는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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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수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창민 교수의 《지금 다시, 일본 정독》은 바로 그런 냉정한 일본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제목의 ‘정독’은 正讀이기도 하고, 精讀이기도 하다고 밝히고 있다. 바르게 읽기이면서, 자세히 읽기라는 의미다. 그동안 일본의 사회, 문화라든가, 역사, 정치에 대해서 주로 접했던 나로서는 경제 쪽을 주로 다루는 이 책이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을 일본의 과거, 현재, 미래로,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이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관련을 갖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시간적으로도 그렇게 멀리 떨어진 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에 대한 얘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일본이라는 나라, 그 나라의 경제를 촘촘하게 들여다보고, 너무 커다란 이야기는 지양한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에 관한 내용에서는 일본에 대한 오해 몇 가지를 바로 잡는다. 일본이 대(代)를 이어가며 오래된 기업을 유지하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족으로 이어지는 기업보다 양도에 의해 이어지는 기업이 많다는 것부터가 의외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특별히’ 근면하다는 신화도 부정한다. 이른바 근면성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일본인 고유의 특징도 아니며 현대의 ‘근면 혁명’ 역시 일본 고유의 사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근면한 일본인이라는 상은 겨우 80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며, 근면 혁명 역시 산업 혁명 이후에 어느 일정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오해에 대한 불식과 함께 일본이 잘 하는 것을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하이브리드’라는 것이다. 돈가스와 단팥빵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서양의 것을 들여와 일본식으로 개량한 것들이다. 인도에서 영국을 거쳐 들여온 커리가 카레가 되고, 프랑스의 크로켓이 고로케가 되고, 서양의 용어를 한자말로 바꾸어 동아시아에 통용시키고 등등. 이러한 특징과 함께 일본만의 적정 기술을 찾는 노력 역시 일본 부흥의 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일본의 현재는 어떤가?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다. 하지만 그 위상에 걸맞는 경제 상황이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 같다. 1960, 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거쳐 80년대의 버블 경제의 추억은 아련해지고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고, 30년이 되는 상황이 맞닥뜨렸다. 저자는 그런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그런 불황을 견뎌내고 극복하고자 하는 일본의 노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최종판이 바로 아베노믹스였다.


일본의 미래는 바로 이 아베노믹스와 관련이 깊은 듯 하다. 아베노믹스로 일본의 실업률은 감소하였고, 경제 성장률도 조금 높아졌다. 하지만 저자는 아메노믹스의 성과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여러 부분이 함께 성장하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단순히 설비 투자로 인한 경제 성장이었다는 것이 골자다. 그리고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모순이 여전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부자 국가, 가난한 국민’에서 오히려 ‘가난한 국가, 부자 국민’의 상태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자는 60, 70대의 노인이라는 데 일본의 문제점이 있다. 돈은 있는데, 그 돈을 빌려 투자하겠다는 기업은 없는 상황, 소비를 꺼리는 젊은 층 등이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리가 일본의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하지 않는다(너무 당연해서?). 다만 일본의 지표가 떨어져서 거의 역전 지경에 이른 구매력 대비 1인당 GNP 등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이제 일본과 대등한 상황에서 경쟁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국제연합 무역개발협의회(UNCTAD)가 2021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시킨 것에서 보듯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할 때라는 점이다. 이제 ‘장기판의 말’이 아니라 ‘장기 두는 나라’로 보다 큰 시야를 가지고 국제 관계를 바라보고 선도해 나가려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분명 일본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과연 고소해하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옆 나라의 몰락, 특히 급격한 몰락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을 경계하고, 비판하고, 경쟁하면서도, 또한 협력하여 이용하여 우리의 발전으로 이끄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일본을 바르게 보고, 자세히 봐야할 필요성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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