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예술 분야의 창조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연주자의 경우에는 창조성의 측면에서는 좀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미술과 비교했을 때 화가가 오래전 명화를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만의 것을 그리려고 하는 것는 달리 오래전에 작곡한 음악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좀 의아하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는 음악가는 기술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거에 읽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비석에 새긴 글씨에 대해서, 그 글씨를 처음 종이에 쓴 사람에 대해 찬탄하다가, 그 평면의 것을 다시 비석이라는 공간에 입체적으로 새긴 석공에 대해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고는 다시 그 입체감을 평면에 구현해낸 서예가를 떠올린다.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똑같은 악보를 가지고 연주하더라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작업, 그 미묘한 것을 이뤄내고, 그걸 통해서 감동을 주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훌륭한 연주자이고, 그런 훌륭한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기술적으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리라.
이 책은 바리톤이면서 워너뮤직 코리아의 상임이사이자 EBS FM <정경의 11시 클래식>의 진행자인 정경이 클래식 음악 각 분야의 12명의 연주자(작곡가 포함)들을 인터뷰한 것을 모았다. 그들의 스승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그들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고, 클래식 음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한다. 사실 1년에 한두 차례밖에 클래식 연주장에 가질 않는 내가 이 책에 소개되고 인터뷰한 우리나라의 클래식 연주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수는 없다. 사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름도 낯설다. 그런데도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 음악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삶의 자세에 대한 책으로 다가오고, 또 그렇게 읽었다.
이들은 모두 인정받는 음악가들이다. 말하자면 원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체로 어릴 때부터 음악성을 인정받았고, 그래서 여러 콩쿨에서 입상하면서 주목받았고, 또 좋은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이들의 말 곳곳에서 알 수 있다. 한 음을 정확히 내기 위해서, 남과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정말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말이다.
좌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타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국력 때문에 콩쿨에서 분루를 삼켜야 했던 경험도 있고(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퍼커셔니스트 심선민은 팔 근육에 무리가 가서 아예 콩쿨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함부르크 강가에서 울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누구든 그런 기억이 없을까 싶다.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이들만이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인터뷰한 이들의 공통점을 들자면 엄청나게 자신의 악기를 연습한 것과 함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연주자가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인문학적인 소양을 닦을 것을 권유받고 교육받았다. 그리고 여기의 많은 연주자들이 음악 외의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며 넓은 생각을 가지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같은 악보에서 나오는 음악에서 새로움을 만들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게 아니라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끝으로 가장 인상 깊은 대목 하나를 얘기해 보고 싶다. 클라리네티스트 조인혁이 말하는 꿈에서 나온다. 그는 연주자가 나이가 들었을 때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케스트라에서 늙은 수석 연주가가 연주력이 떨어지는 것은 거의 당연한 것인데, 끝까지 정년을 지키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평단원으로 내려와 자신의 경험으로 젊은 수석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이야기한다. 아름답게 무대에서 내려올 줄 아는 연주가를 꿈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찾아가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걸 이 젊은 연주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게 유일한 정답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을 음악과 연주를 통해서 만들어가고, 남에게 감동을 주면서 살아가는 창조적인 연주자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