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사실이라 기록된 된 것이 있고, 그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해석해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로 만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역사의 왜곡이라 못마땅해 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틀어 쓰거나 보여준 역사가 그 당시의 상황을 넘어서 현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사점을 남겨 준다면 과감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전형진의 『금주령』은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내려졌던 금주령 중에서도 영조 재위 시에 내려졌던 금주령을 배경으로 한다. 금주령은 백성들의 삶이 팍팍하여 먹을 쌀도 없는데, 쌀로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1920년대 미국에서 보듯이 많은 폐단을 낳았다. 밀주가 성행할 수 밖에 없었고, 밀주를 거래하는 범죄 집단이 많은 이득을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영조의 금주령은 정치적인 목적도 띤 것이었지만, 왕의 정치적 목적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기록된 역사는 사도세자 이선의 죽음이다. 잘 알 듯이 사도세자는 온갖 기행(奇行)을 벌였고, 결국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가 영조의 엄한 훈육에 광증(狂症)이 생겨 그리하였다고 기록했다. 사도세자가 작은 트집으로 많은 궁인들을 죽였다는 기록도 함께 전했다.
하지만 소설 『금주령』은 사도세자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어진 왕자였으며, 심지도 굳어 불의에 대해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고 실제로 조직을 만들어 그것을 이루려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지배세력인 노론의 강고한 저항과 술책을 넘지 못하고, 결국은 자신의 선택, 내지는 아버지 영조와의 거래(?)에 의해 죽음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소설은 쓰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면 커다란 반발이 있을 수 있지만, 엄연히 『금주령』은 소설이고, 소설적 상상력은 기록된 역사를 비틀어 독자에게 짜릿함과 좌절감을 함께 선사할 수 있다.
장군 장봉익에서 그의 손자 장기륭으로 이어지는 축과, 울산도후부 백선당의 양일엽에서 손녀 숙영으로 이어지는 축이 소설의 뼈대다. 거기에 검계라는 범죄 조직의 표철주와 이철경이 엇갈리고, 조정에서 권력을 쥔 김판중과 김규열의 세력이 있다. 장봉익-장기륭과 양일엽-숙영의 두 가문은 여러 인물들을 매개로 결합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은 악의 세력을 척결하고자 힘을 모은다.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이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소설에 가장 자세한 장면들이 바로 그 전투의 장면들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미 합(合)을 맞춘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것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처럼 자세하다.
금란방에서 묘적으로 이어진, 의기로 뭉친 이들은 결국 검계를 소탕하지만, 끝내는 좌절하고 만다. 그 범죄 조직을 만들어 낸 뿌리이자 악의 최상층을 제거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 지점부터 소설은 기록된 역사로 되돌아간다. 노론이 권력을 쥐고 왕권을 뛰어넘는 세력을 형성하며 백성에 대한 착취를 일삼은 조선 후기의 암담하고 혼란스런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금란방과 묘적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잠깐 활약했던 (장길산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소설이지만, 정말 소설처럼 그들의 활약은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소설은 드라마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인물을 어떤 배우가 맡을 것인지 상상하며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혹은 소설 그대로 드라마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터이니 나라면 어떤 부분을 바꿔볼 수 있을까도 생각해봤다(예를 들면 장길산 같은 이의 등장은 너무 소설 같다). 금방 나오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떻게 만들어질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