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유정은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습작 시절 스티븐 킹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필사도 했었다 했다. 그리고 스스로 주변의 풍경과 사물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했다. 스티븐 킹은 ‘이야기의 제왕’으로 불리지만, 그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그 세밀한 묘사와 설명 때문이다.
아무 데나 펼쳐본다.
“그가 콧잔등에 화상 방지 연고를 바르고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어쩌면 러닝셔츠)를 입고 잔디밭으로 나서면 소속감이 한 단계 높아질 것이다.” (1권 140쪽)
“쇼핑백을 안으로 들고 가서 빌리의 객실 화장실에 둔다. 20킬로그램짜리 미라클 고 화분용 흙 네 봉, 5킬로그램짜리 버거루 지렁이 분변토 다섯 봉, 10킬로그램짜리 블랙 카우 비료 한 봉이다.” (2권 226쪽)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 풍경을 그렇게 자세히 살피지는 않는다. 이미 우리 의식 속에는 어떤 디폴트 값이 있어서 많은 것을 생략하고서 그러려니 판단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띄엄띄엄 본 것들을 연결하는 데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디폴트 값들을 이용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은, 기억 속에서 왜곡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정말 그렇게 기억되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대충 본다.
그런데 소설가는 그러면 안 된다. 소설가는 독자에게 독자 수준의 관찰을 통해서 설명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독자들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소설가에게 원하고(물론 여기서도 독자들은 띄엄띄엄 읽으며 읽지 않고 지나간 것을 익숙한 것으로 대체한다. 자주), 그런 과정을 통해 익숙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
나 스스로도 좀 의외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은 이 《빌리 서머스》가 처음이다. 그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니 알고 있었으므로 의도적으로 그의 책을 집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의 작품은 영화로 적지 않게 접했을 것이다. 영화로 많이 제작되었다는 건 당연히 이야기의 역할이 클 것이다. 앞에서 세밀한 묘사와 설명을 이야기했지만, 그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단은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한다. 적어도 문학평론가가 아닌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빌리 서머스》도 그렇다.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지만, 지나치게 복잡하게 끌고 가지 않아 독자들이 충분히 따라가게 만든다. 그러면서 반전을 구비해놓고 있다. 그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의 변화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나’를 이 인물들의 어디쯤에 위치시켜야 할지 그렇게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인물이 누구든지 간에.
《빌리 서머스》은 또한 스티븐 킹의 소설가, 즉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짙게 드리운 소설이다. 살인청부업자가 글을 쓰게 되는 이야기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 글을 쓰면서 맞닥뜨리는 자신의 과거와 자아, 그것을 통해 얻는 위안. 그리고 그 글에 담긴 진심은, 비록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만이 아니라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진다. 앨리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슬픈 걸 잊을 수 있었어요.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었어요. 여기가 어딘지 잊을 수 있었어요. 그럴 수 있을 줄 몰랐는데.”
글은 사실이 아니라도,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앨리스가 맺은 이야기처럼. 이 소설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