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이 납치됐다

히가시노 게이고, 《백은의 잭》

by ENA

우선 제목부터. ‘백은(白銀)’이라는 걸 봤을 때부터 이건 스키장 얘기라는 걸 알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못 말리는 스노보드 매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 말이다. 《눈보라 체이스》와 《연애의 행방》, 《질풍론도》에서 이미 그 면모를 보여줬으니 하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이 소설의 배경이 어디쯤이란 것은 알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잭’이다. 뭔가 했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알 수 있다. ‘잭’은 ‘하이잭(hijack)’에서 가져온 말이란다(하이잭은 미 서부 개척 시대 갱들이 마차를 납치할 때 달리는 마차 옆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하듯 하는 말에서 비롯된 말이다-이건 ‘작가의 말’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백은의 잭’이란 스키장에서의 납치 사건, 혹은 스키장 납치를 의미한다(소설은 두 번째의 의미다). 그럼 어떻게 스키장을 납치할 것인가? 그거야 스키장을 범인이 자신의 통제 하에 두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물론 협박을 통해. 이런 대충의 얼개가 짜졌다면 이 얘기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작가의 몫이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 물론 그는 훌륭하게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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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묘미는 속도감이다. 설원을 가로지르는 스키와 스노보드의 속도만큼이나 소설의 속도가 스릴 만점이다. 단 며칠 사이의 일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은 스토리의 정교함과 작가의 필력 덕분이다(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닌가). 거기에 겨울 스포츠에 대한 지식과 애정까지 갖추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소설에서 스릴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대부분은 공포스러움에서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의 스릴은 바로 글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는 속도감에서 나온다. 장면을 상상하면서 느끼게 되는 속도감!


거기에 예상을 깨는 구성도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중간 정도에서부터 이 사건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악(惡)은 힘 있는 세력에게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게 이 소설이 가지는 반전의 매력이다. 그저 단순히 “그게 아니었어!”란 식으로 독자를 놀리듯 정반대의 결론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결론을 둔 채, 그것에 맞선 대응이 반전이 되는 구조다. 생각해보면 《용의자 X의 헌신》을 비롯한 많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그랬다. 그래서 결론에 놀라면서도 놀림을 당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어쩐지 따뜻함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백은의 잭》의 주인공 격이 네즈 쇼헤이는 《눈보라 체이스》와 《연애의 행방》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그때의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아닌 줄 알았는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맞다. 찾아보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키장을 배경으로 쓴 소설 중 이 《백은의 잭》이 먼저다. 또 찾아보니 2011년이 이미 《백은의 잭》이 번역되어 나왔었다. 이렇게 거슬러 읽어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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