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캐서린 앤 포터,『캐서린 앤 포터』

by ENA

1900년대 초반 미국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 1890-1980)의 800쪽이 넘는 작품집 『캐서린 앤 포터』를 읽다 보면 중간쯤에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를 접한다. 이 소설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스페인독감이 번지던 1918년이 배경이다. 신병 훈련을 받고 전쟁이 벌어지는 유럽으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애덤과 소도시의 지방 신문의 연극 기사를 담당하는 기자 마린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경험에 기댄 팬데믹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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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앤 포터는 스페인독감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난 경험을 가졌다. 그 경험은 소설집의 몇 편의 소설에서 다루어진다.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와 <오랜 죽음의 운명>도 그렇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은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다. 캐서린 앤 포터는 소설 속 주인공인 미란다처럼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던 기간에 스페인독감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군인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녀의 상태는 심각해 신문사에서는 부고를 미리 준비했었다고 하며,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는 대머리가 되었고,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을 때는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스페인독감을 연상케 하지만(스페인독감의 별명은 ‘죽음의 청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였다), 소설에서는 미란다와 애덤의 데이트 장면에 장례 행렬(아마도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죽음)을 등장시키며 불안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애덤과 미란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나저나, 거기 군인들이 벌레처럼 픽픽 죽어 나가고 있더라. 요즘 도는 그 이상한 병 때문에 말이야. 걸렸다 하면 곧바로 황천행이야.”

“그거, 무슨 중세 시대에나 돌던 전염병 같아. 거리에 장례 행렬이 이렇게 많은 건 난생처음 봐, 안 그래?”


둘은 애덤이 연장을 허락받은 휴가를 알차게 보내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미란다부터 몸에 이상 증세를 느끼고 자신의 방에 눕고 만다. 미란다는 사경을 헤매면서 의식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애덤은 그녀를 피하지 않고 간호한다. 사랑을 고백하고... 하지만 애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미란다는 병원으로 호송되고, 그게 애덤과의 마지막이 되고 만다. 미란다는 포터가 그랬듯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고, 전쟁도 끝났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온 후 읽은 편지에서 애덤의 사망 소식을 읽게 된다. 한 달도 더 전에 군 병원에서 인플루엔자로 죽었다는 소식. 애덤은 스스로 살면서 한 차례도 아파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스페인독감이라는 병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통계도 젊은 청년들이 나이 든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미란다는 “애덤, 이제 너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어졌구나. 그래도 네가 여기 있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돌아왔다면 좋았을 텐데. 이럴 거면 나는 뭐 하러 돌아온 거야, 애덤. 이렇게 기만당한 나는?”이라며 안타까워 하고, 전쟁도 전염병도 없는 세상에서 오히려 더 삭막한 거리를 바라본다.


소설에서는 아마도 포터의 경험일 듯한, 스페인독감으로 인해 죽은 이의 흔적을 이게 쓰고 있다.

“살아 있는 두 남자는 벽에 구부정히 기대어져 있던 매트리스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죽음 남자의 몸 위에 매트리스를 살며시,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바퀴 달린 침상을 복도 저편으로 밀면서 나아가다가 이내 하얗게 사라졌다. 황홀하고 한가로운 구경거리였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자취에 파리한 흰빛의 안개가 불길하게 피어올라 미란다의 눈앞을 떠다녔다. 그 안개 속에는 학대당하고 유린당한 모든 생명의 공포와 피로가,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비틀린 등과 부러진 발이, 온갖 형태를 띤 혼란한 고통과 외떨어진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안개가 흩어져서 인간의 온갖 번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안 되는데, 아직 안 되는데, 하지만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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