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혹은 카프카적(的)

프란츠 카프카, 『돌연한 출발』

by ENA

프란츠 카프카의 연대기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공부를 하였으며, 어떻게 밥벌이를 했으며, 어떻게 글을 썼는지. 몇 번의 약혼을 했으며, 그 약혼이 어떻게 깨졌는지. 유언으로 친구에게 자신의 글을 모두 불살라버리라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한 친구에 의해 인류의 자산이 조금이라도 늘어났다는 것까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란츠 카프카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카프카적(的)이란 말이 있다. 많이 들었다. 말하자면, 카프카와 비슷하다, 카프카가 그린 세계를 재현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에게는 쓸 수 없는 말일 텐데, 그 말과 그 말의 표적을 추적하다도면 결국은 카프카를 만난다. 어쩌면 아이러니다. 우리는 카프카로 카프카를 설명하고 있다. 카프카는 카프카로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카프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존재로서 자신과 세상을 상상한다. 그 존재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카프카는 벌레가 되어도, 두더지가 되어도 인간의 세상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게 그게 바로 인간의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보다 객관적인 인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주관적이면서, 가장 객관적인 인식이다. 그렇게 기괴하고, 왜곡된 세상 보기(또는 그런 세상을 보기)야말로 20세기 초 굉장한 희망의 노래를 부르다 한꺼번에 지옥을 맞본 인류에 대한 처참한 인식, 반성인지도 모른다. 너무 개인적이지만, 그 개인적인 인식에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다.


IMG_KakaoTalk_20230427_205534399.jpg



<변신>이나, <선고>, <굴>과 같은 진짜 단편소설 같은 소설도 있지만, 많은 소설이 한두 페이지짜리다. 소설들에 대한 아이디어 같은 이 글들은 마치 산문시처럼 읽힌다. 아니라면 그가 이 글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변신>은 다시 읽으니 예전보다 더 암울하다. 예전에는 그저 우화(寓話)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너무 현실적이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말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굴>을 열심히 읽었다. 이 집요한 소설을 또 본 적인 있나 싶다. 카프카는 이 <굴>만 ‘빼고’ 불태우라는 유언을 했다. 그렇다면 <불>을 그의 유언으로 볼 수도 있을까? <선고>나 <가장의 근심>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글임에 분명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방법도 있다. 아니 이런 방법밖에 쓰지 못한다. 카프카적!

keyword
작가의 이전글책의 영원성에 관한 감격스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