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윌리엄!』을 십여 쪽 읽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속편이라는 걸 알고는 잠깐 밀쳐두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부터 읽고 읽었다. 두 소설은 한 소설의 1부, 2부라고 하더라도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만큼 연결되어 있다. 오히려 『올리브 키터리지』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더 관련성이 먼 듯싶을 정도로(그러고보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의 제목은 대부분 사람 이름을 쓰는구나!).
여기서도 루시 바턴의 목소리로 모든 이야기를 한다. 비록 제목은 화자인 루시 바턴의 전남편이고, 이야기의 맥락은 그가 중심인듯하지만 결국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 바로 루시 바턴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 이어 여전히 그녀의 자아, 내지는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고 있고, 그녀가 만난 윌리엄보다는, 결국에는 그녀와 다를 바가 없었던 윌리엄의 어머니, 캐서린에 관한 이질감, 그리고 결국에는 동질감이 그녀의 감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그녀는 참 많이 울고 있다. 가난이 서러워, 그 가난으로 인한 사람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소통하지 못해서, 재혼한 남편이 죽어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등등. 그 울음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그저 그렇다는 이야기다.”는 투로 마무리한다. 그녀의 감정은 그때의 것이고, 그것들을 이제는 초월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나의 감정이 이해받지 못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포기인가? 루시 바턴은 다른 이의 감정을 이해하려 들어가다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것은 ‘우리는 타인의 경험은 결코 모른다’는 깨달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섣불리 타인을 이해하려 말자는 다짐. 너무 알려고 드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알게 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윌리엄에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남자라는 생리적 조건에서 그렇고, 직업적으로도 매우 비슷한(정말 많이 비슷하다) 상황에서도 그렇다. 물론 나의 아버지는 나치의 편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지도 않았고(우리쪽에서 보면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으로 싸우도 포로가 되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것도 아니다), 의문스런 과거를 가진 어머니도 없다. 그래서 이부누이도 없으며, 세 번째 부인마저 떠나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잃어가는 권위(그런 게 있었다면)를 생각하면 더없이 측은하며, 그래서 밤마다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아픔을 선뜻 남과 공유하지도 못하는 윌리엄을 보면서 무언가... 나도 “오, 윌리엄!”하고 되내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루비 바턴의 목소리로, 루시 바턴의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집요하게 헤집고, 윌리엄의 공포와 잃어가는 권위에 공감하려 하고, 캐서린의 위선적인(?) 과거를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라고 해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포기 선언일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진지한 노력 끝에 나오는 겸손한 인간 이해라고 믿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신화이며, 신비로우며,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