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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Aug 14. 2023

중세를 다시 보다

매슈 게이브리얼, 데이비드 M. 페리, 『빛의 시대, 중세』

‘중세’라고 하면, 보통은 ‘암흑시대(Dark Ages)’라는 별칭을 먼저 떠올리고, 이어서 야만, 무지, 종교적 맹신, 문명의 퇴행 등을 연상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그런 극단적인 평가에서 조금은 물러서고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중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찬란하거나, 혹은 정돈된 세계와 근대 이후의 문명화된 세계 사이에 낀, 그렇지 못한 시대로 여겨진다. 1,000년에 걸친 시기 동안 인류(사실은 유럽인)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들의 말마따나 “고립되고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중세 유럽의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대중문화에 배어”들어 있다.


중세학자 매슈 게이브리얼과 데이비드 페리는 중세에 관한 맹목적인 편견을 걷어내고 나면, 사람이 살았고, 서로 교류하며, 조금씩 발전해나가는 그런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그 시대에 폭력성이 덜 하지도 않았지만, 그와 함께 공존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종교적 맹신으로 불타올랐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러 종교가 서로를 인정하기도 했던(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들은 바로 중세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탈리아의 라벤나(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의 예배당)에서 시작하여 다시 라벤나(단테의 『신곡』)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모두 16개 도시의 모습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책에서 게이브리얼과 페리는 시종일관 중세를 ‘빛의 시대’라 칭하고 있다. 이는 ‘암흑시대’라는 명칭(아마도 페트라르카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빛내기 위해 이전 시대를 깍아내려야만 했던 데서부터 유래한)이 그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이 짙은 명칭이기에, 그 반대로 ‘빛의 시대’라는 새로운 인상을 주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실제로 그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더 ‘빛’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대도 ‘빛’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라벤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예루살렘에서, 메카에서, 아헨에서, 톨레도에서, 바그다드에서, 파리에서, 피렌체에서 그 빛은 사그라들 듯 사그라들지 않으며 사람들 위에서 빛이 났다.


전체적으로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이게 되는 부분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다.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아헨의 왕궁까지 옮겼던 장면, 기독교인들이 몽골 궁정에서 자유롭게 지냈던 것에서 대표적으로 보듯이 중세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만남은 폭력(십자군 전쟁에서 볼 수 있듯)으로 끝난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부를 쌓는 원동력이 되었고, 상대를 이해하여 철학의 발전을 잇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의 억압, 영주의 지배 아래서 죽도록 일만 하다 쓸쓸하게 죽어가는 인생의 반복만을 떠올렸던 나에게는, 새로운 인식인 셈이다.


저자들은 중세의 진실은 “단순하거나 명확하지 않고, 뒤죽박죽이고 인간적”이라고 쓰고 있다(여기서도 ‘빛의 시대’라고 쓴다). 어느 시대를 볼 때 한 면만을 보고 규정하고 낙인찍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편견 짙은 행위이며 인식인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 인식이 위험한 것은, 단지 중세라는 시대를 오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편협함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우리의 시대를 바라보고, 다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 책을 “우리의 앞길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맺고 있다. 한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을 넓게 갖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어떤 바람으로 썼는지를 알 수 있는 맺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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