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만든 그날의 세계사』와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가 이미 번역되어 있는 의학사가 로날트 게르슈테의 『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은, 이를테면 마이어 프리드먼와 제럴드 W. 프리들랜드의 『의학의 도전』과는 의학을 보는 관점이나 서술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의학의 도전』이 서양의학사에게 가장 중요한 업적 10개를 여러 단계를 통해 추리고, 그에 대해서 조금 확대하여 서술하는 방식으로, 주로 의학사의 ‘빛’을 서술하고 있다. 반면 게르슈테의 『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는 우리말 제목과는 좀 달리 의학사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몇 명으로 한정하여 서술하는 대신 시대와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혹은 시대를 앞서간 여러 의학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을 구한 의학의 전설들』는 시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이야기다. 1840년부터 1914년의 서구다. 이 이야기의 끝인 1914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이 시점을 끝으로 (물론 서구의 기준이지만) 낭만의 시대가 끝이 났고, 현대가 시작되었다는 게 바로 게르슈테의 시각이다. 반면 1840년의 의미는 다소 애매하다. 정확히 1840년이라는 한 해라기보다는 1840년대에 이루어진 제멜바이스의 감염 예방을 위한 손씻기 주장, 코닐리어스 또는 다게르의 사진 발명, 윌리엄 모튼의 마취법 발견 등을 의학사의 한 기점을 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말하자면 게르슈테는 이 시기를 서양의학사에서 비로소 과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새로운 의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판단하고 있고(나도 실제로 그렇다고 본다), 사회의 급격한 흐름에 부응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두 가지로 좀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제목대로 의학적 성취 자체에 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그런 의학적 성취의 배경과 관련한 내용이다. 의학적 성취로 크게 다루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감염 예방
윌리엄 모턴과 제임스 심슨의 마취법(에테르 증기와 클로로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간호와 위생 관념
존 스노의 콜레라 예방 지도
조지프 리스터의 소독의 개념
알브레히트 폰 그레페의 안과 수술
코흐와 파스퇴르의 업적들
세포병리학을 시작한 피르호
프로이트의 코카인과 정신의학
외과의사 윌리엄 할스테드를 도운 수술 장갑
빌헬름 뢴트겐의 방사선 사진
에밀 아돌프 베링의 디프테리아 혈청
최초의 매독 치료제를 개발한 파울 에를리히
란스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 혈압계의 발견, 수혈
이렇게 보면 이 시기에 우리의 목숨을 살리고, 수명을 늘려준 많은 성취가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그 성취가 100년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의 사회적 배경들도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단지 배경이 아니라 중요한 의학적 성취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의학의 발전이 단지 의학 자체, 혹은 의사나 과학자의 단독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 배경을 지닌 것이란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진술의 개발이 가져온 의학적 발전이 그렇고, 근대 의료보험을 최초로 실시한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그밖에도 남북전쟁을 최초의 현대전임과 동시에 획기적인 의학적 진보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나, 자동차의 등장으로 의학의 또다른 분야, 혹은 트라우마가 시작되었다는 것,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온 인식의 변화, 앙리 뒤낭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적십자 등이 그렇다.
이 책을 통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놀라운 의학적 성취를 시대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그런 사회와 의학 사이의 절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