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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Aug 20. 2023

과학의 작동 방식과 과학이라는 지적 활동의 본질

마이클 스트레븐스, 『지식 기계』

제목의 ‘지식 기계(knowledge machine)’은 지식 생산 기계(knowledge-producing machine)를 줄어 말하는 것으로, 현대과학을 의미한다.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스트레븐스는 과학 방법주의자(방법론자?)인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의 논의에서 시작하여 17세기 과학혁명과 현대과학의 작동 방식을 통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지적 활동의 본질을 캐고 있다. 




저자는 우선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이 주장한 과학의 본질, 혹은 과학적 방법에 대해 개괄하고 있다. 포퍼와 쿤을 대표하는 용어는, 물론 ‘반증주의’와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저자는 포퍼와 관련해서는 ‘반증(falsify)’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사실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아주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야 맞기는 하다). 포퍼의 경우에 과학이라는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이론이 존재하는 경우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신뢰할 이유가 없으며, 거듭되는 반증의 과정을 통해 살아남는 이론이 존재한다고 봤다. 물론 그것이 절대 진리는 아니다. 다만 검증이라는 과정을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통과한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믿을 만한 이론이며, 이에 기초해서 과학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봤다. 포퍼는 ‘비판’이 과학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본 것이다.


쿤과 과련해서는 패러다임을 과학혁명을 방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이라는 활동이 훌륭하게 영위되는 공간, 즉 과학적 방법이 행해지는 영역으로 보고 있다. 패러다임 안에서 이뤄지는 쿤의 과학 활동은 비판이 이뤄지기 힘들다. 대신 과학자들은 시야를 좁히면서 지향점과 자신의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통해 더 깊이, 더 멀리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트레븐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포퍼적 비판정신은 물론 패러다임에 대한 보편적 복종에 대한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이론과 데이터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서, 과학자들은 어떠한 규칙도 거의 따르지 않는 것 같다.”


스트레븐스는 이에 관한 예를 몇 가지 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승인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에딩턴의 개기일식 관찰에 대한 해석과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의 대립을 해결했다고 알려진 파스퇴르의 백조목 실험(푸쉐가 반대의 실험을 했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 등이 그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포퍼나 쿤의 과학 방법론이 옳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대신에 과학을 하는 인간, 즉 과학자의 약점을 볼 수 있고, 주관성이 과학 활동에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과학적 추론의 짐칸에 자신들의 도덕적?심리적?과학적?문학적 수하물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래서 스트레븐스는 포퍼와 쿤의 것 대신에 과학 활동의 본질에 관한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바로 “설명의 철칙(iron rule of explanation)”이다. 이 철칙이 가져온 혁신이 현대과학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인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얕은 인과적 설명

둘째, ‘논증’과 ‘추론’의 구별

셋째, 객관성 요구

넷째, 경험적 시험에 의한 결과만 받아들임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얕은 인과적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와 뉴턴을 비교하는 데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는 자연이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되는지에 관해 아주 깊이, 원론적인 설명을 구했다. 반면 뉴턴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현상을 기술하고, 그것에 관해서는 ‘얕은’ 설명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현대과학은 깊은 원론적 설명에 대한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무거운 족쇄를 걷어낼 수가 있었다.


‘논증’과 ‘추론’과 관련해서는, 사적인 생각과 공식적인 발표 사이의 차이이다. 역시 뉴턴(저자는 뉴턴이야말로 현대과학의 시조라고 본다)의 예를 들자면, 그는 사적으로는 연금술과 같은 비과학적인 시도에 탐닉했고, 자연 현상에 신의 의도가 깊이 개입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논문과 책에는 쓰지 않았다. 즉 개인적인 ‘추론’과 공식적인 ‘논증’을 구별했던 것이다. 지금도 신앙을 가진 과학자가 적지 않지만, 신앙을 논문에 반영하지 않는다(물론 없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현대과학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주관적 견해와 객관적 설명을 구분해서 발표하는 것도 현대과학의 혁신이다.

“추론과 논증은 과학에서 평화롭게 공존한다.: 추론은 과학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며 그들의 판단, 감정, 성향에 의존하는 반면, 논증은 과학이 지정한 의사소통 기관에 존재하며 소독에 의해 그런 것들이 배제된다.”


여기서 ‘소독(steriliz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과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 판단, 성향들을 배격하는 것, 나아가 전체적 논지를 흐리는 잡스런 데이터를 배제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과학 활동에서 ‘소독’은 일상적이다.

“과학에서 특별한 것은 객관성이 아니라 ‘소독에 의해 달성된 독특한 객관성’이다.

즉, 과학에서 말하는 ‘객관성’이란,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객관성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 오해하면 과학 활동 자체를 오해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현대과학의 혁신은 ‘관찰’이 절대적 우위에 둠으로써 가능해졌다. 여기서 관찰은 ‘경험적 관찰’로, 실제로 관찰하고, 측정하고, 계산된 것을 말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과학 저널이라는 ‘경험적 관찰의 객관적 기록부’에 기록될 수가 없었다. 그런 객관성이 표출된 것으로는 물론 뉴턴을 들고 있으며, 더불어 ‘베이컨의 처방, 튀코 브라헤의 정확한 측정, 로부터 보일의 ’이론에 대한 실험의 우위‘, 케플러의 수리천문학, 갈릴레오와 하위헌스의 수학적 메커니즘, 왕립학회의 출판물’을 들고 있다.


현대과학을 추동한 혁신에 대한 제시 이후 스트레븐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한다. 바로 왜 ‘과학은 왜 그토록 늦게 등장했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현대과학’이라고 하지 않고, ‘과학’이라고 한 점이다. 즉, 저자는 과학혁명 이후의 과학이라야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하듯이 탈레스니,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활동을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 앞의 현대과학의 혁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전략적 비합리성’과 ‘아름다움과의 전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과학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애써 종교적, 철학적인 고려를 배격하고, 오히려 명백하게 보이는 것을 거부하는 비합리적 결정, 미학적 고려 없이 실체를 그대로 판단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특히 미학적 고려와 관련해서는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인데, 좌우의 대칭, 숫자 4나 5에 맞추려는 강박 등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런 건 사적인 자리에서나 주장하고, 대신 그냥 보이는 대로 기술하고 발표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의 과학이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는 데 그리 오래 걸린 셈이다.


스트레븐스는 과학에서 대한 규격화된 설명을 배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강박적인 의도와 부담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과학이 되었다는 시각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 이뤄지는 과학이라는 활동의 본질을 찾으려 했다. 많은 부분 공감한다. 우리가 지금 하는 대부분의 과학 활동은 어떤 커다른 철학이나, 대의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만이었을까? 과학에서 ‘철학적 사고’라 설 자리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학 활동에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절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물론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발표이지만, 그 뒤의 활동 역시 과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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