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가을, 아인슈타인은 일본을 방문한다. 아직 노벨상을 타기 전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수상 소식을 받았다. 일본은 세계적 과학 ‘스타’에 열광했다. 도쿄는 물론, 교토, 후쿠오카, 센다이, 심지어 삿포로까지 강연회가 이어졌고, 비싼 입장권은 모조리 팔려나갔다.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교육협회’의 이름으로 몇 명의 일행이 일본으로 향했다. 조선교육협회는 민립대학 설립을 준비 중이었고, 아인슈타인을 조선으로 초청해 그 동력을 얻고자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아인슈타인 붐이 일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일정을 세세하게 보도하기도 했고,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을 소개하는 기사가 시리즈로 연재되기도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조선 땅을 밟지 못했지만,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나아가 과학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전도유망한 학생들이 조선에 들어와 상대성이론 순회 강연회를 연 것이다. 역시 성황이었다. 과학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이들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 아인슈타인을 맨 처음 소개한 인물은 황진남이다. 그는 함흥에서 태어나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니다 3.1 운동 이후 대학을 그문두고, 안창호를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베를린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대학을 다니고 귀국한 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좌우가 모두 참여하는 건국을 추진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일본으로 갔고, 1970년 오키나와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최규남이라는 인물이 있다. 황진남이 아인슈타인을 소개하고 있던 그해에 연희전문 수물과(수학과+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야구선수로도 유명했던 그는, 졸업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으로 유학간다. 그리고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물리학 박사다. 해방 이후 5대 서울대총장을 지냈고, 문교부 장관도 지냈다.
최윤식, 김영식, 한위건, 이춘호, 이태규, 도상록, 우장춘, 리승기, 이여성, ...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의 부흥을 꿈꾸던 이들이다. 『판타 레이』에서 유체역학의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였던 민태기가 이번에는 놀랍게도 우리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그속에서 고군분투했던 과학을. 비록 제목은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다)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라고 해서 아인슈타인을 부각시켰지만, 아인슈타인은 식민지 조선에 과학의 열정을 타오르게 했던 계기였을 뿐, 그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과학의 꿈을 조선에 펼치고자 했던 선구적인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민태기가 그리고 있는 이 역사는 단순한 ‘과학사’가 아니다. 모두 그 시대를 살아간 과학자였다. 시대의 좌절, 시대의 혼란이 고스란히 그들의 삶에 엉겨붙어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서재필의 귀국에서부터 시작하고, 친일의 역사를 다루고, 변절의 역사,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한글 운동, 해방 이후 좌우 대립 등등이 모두 등장한다. 그 시대를 살다간 과학자들의 삶이 과학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과학을 모토로 살다간 이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시대의 우리 과학의 역사를 찬란하다, 위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한 나라의, 한 사회의 과학 수준이라는 것은 어떤 한 명의 위대한 과학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과학 수준은 정말 별로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몇 명의 뛰어난 과학자, 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선각자만으로 우리의 과학 수준이 놀라웠다고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또한 그 한 움큼밖에 되지 않았던 우리의 과학자들도 여러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과 친일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과학이 그런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 안된다. 누구나, 특히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이들은 모두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상처로 얼룩졌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바로 황진남의 생애가 그걸 아프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과학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온갖 갈등에도 놓지 않았던 과학의 꿈이 100년이 세월이 지나 지금 우리의 과학이 되었다.
정말 모르던 얘기들이 많다. 인물들부터 낯선 이름에 헉헉거렸다. 조금 부끄럽다 생각했고, 그래서 정말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인물들의 관계는 더더욱 놀라웠다. 이것들을 어떻게 다 알아냈을까 싶을 정도다. 많은 자료가 뒷받침되었겠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작업은 도전 정신과 함께, 역사와 과학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