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세계적 과학 스타였다. 그가 일본으로 초청되어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식민지 조선 땅에서까지 알려져 그를 모셔오고자 대표단이 급파되었다는 얘기를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가 생생하게 전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의 동쪽 끝(그들이 보기에)에서도 그 난리였는데, 유럽에서는, 미국에서는 어땠을까?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그의 상대성이론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매력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해하기 힘들다는 과학이론으로 단지 뛰어난 과학자, 유명한 과학자를 넘어서는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은 1905년 스위스 특허국 소속 직원이었을 때라는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해에 상대성이론 말고도 광전효과(이것을 노벨상을 받는다),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1905년은 ‘기적의 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바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특허국 소속 직원이 논문 하나로 대번에 유명해질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그 이론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문 판에. 다만 막스 플라크와 같은 독일 과학의 지도급 인사가 알아봤고, 그 덕에 아인슈타인은 독일 과학계 내에서 조금 유명해지며 베를린에 입성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몇 년 후에.
이후로 아인슈타인은 아직 특수한 상황에만 적용되는 자신의 이론을 일반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키고자 갖은 애를 쓴다. 1916년에 이르러서야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이르러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 예측된다. 매튜 스탠리는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또한 선취권 다툼까지 있었다는 걸(예를 들어 수학자 힐베르트와)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시기는 바로 1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였다. 그러니 그의 이론이 독일 밖으로 알려지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독일 내에서도 그의 정치적 입장 등으로 대대적인 호응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영국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19년 개기일식이 예상되자 브라질과 적도 바로 아프리카의 프린시케섬으로 팀을 둘로 나누어(자신은 프린시페섬으로 갔다) 사진을 통해 중력에 의한 빛의 휘어짐 현상을 관측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대로 중력에 의해 빛이 휘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선언했다. 바로 그 ‘사건’으로 전 세계의 언론이 뉴턴을 넘어서는 천재, 새로운 세계관을 선포한 선지자로서 아인슈타인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아인슈타인은 스타로 떠올랐다. 바로 에딩턴의 관측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튜 스탠리는 바로 이 이야기, 즉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 이후 일반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스탠리는 다른 책에서는 달리 아서 에딩턴을 아인슈타인과 거의 동등한 주연급으로 다루고 있다. 독일의 아인슈타인과 영국의 에딩턴을 서로 교차시켜가며 그들의 고난과 활약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승리가 바로 둘의 공동 업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에서 그런 이론을 발전시켜나가고, 또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론이 예측한 것을 관측해냈다는, 시기적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이 전쟁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스탠리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체주의 쪽에 서서 성명을 발표한 93인의 명단에 포함되기를 거부했고, 끝까지 전쟁에 반대했다(물론 그 파급력은 아직 별로이긴 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전쟁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에딩턴의 상황이었다. 에딩턴은 퀘이커교도였다. 퀘이커교도는 전쟁을 반대한다. 따라서 많은 신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해서 수모를 당하거나 심지어 감옥에 갔다. 에딩턴은 뛰어난 천문학자로, 전쟁 초반 왕립천문대의 수장이었으므로 징집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청문회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국가에 필요한 과학 자원으로 인정되었고, 참전하지 않고 자신의 과학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역시 평화주의자였고, 국제주의자였다. 전쟁 시기 과학계는 분열되었다. 영국의 과학자는 독일의 과학자를, 독일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과학자를 경원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연합국은 과학계를 재건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과학자들 아예 배제해버리기도 했다. 에딩턴은 결연히 반대했다. 에딩턴의 개기일식 원정은 그의 평화주의적, 국제주의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만나보지도 못했고, 단 한 차례 개인적으로 연락해보지도 않았던 영국의 천문학자가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드 지터의 편지를 받고 상대성이론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이론을 연구한 끝에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증명이 국제과학 네트워크 복원에 중요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 신념이 전쟁이 끝나자마다 모두가 경원시하던 적국의 과학자가 세운 이론을 증명하는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에딩턴의 관측과 아인슈타인의 유명세는 세계대전 이후 국제 과학계에 독일의 과학자가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
마이클 스트레븐스의 『지식 기계』에서는 근대 과학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에딩턴의 개기일식 관측이 여러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음에도 그의 그런 신념이 아인슈타인의 예측치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스탠리는 여러 가능성이 있음에도 아인슈타인의 예측치만을 발표하는, 에딩턴이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데이터가 스스로 말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것은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과학자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것을 주관적으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딩턴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그 이후의 반복된 관측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스탠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그의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또 어떻게 유명해지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전 단순하게 과학자의 과학에 관한 일만은 아니었음도 굉장히 이성적이지만, 또한 굉장히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