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을 처음 읽었을 때(출판된 건 2016년이었다) 나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이란 게 심장이 마구 고동치는 것도 있겠지만, 《가만한 당신》을 읽었을 때는 매우 고요해지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새로운 느낌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충격이라면 충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삶, 이렇게 기억되는 삶.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주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조금은 낯설면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물론 보통의 삶은 아니다. 그들의 삶을 기록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최윤필도 그것을 바탕으로 기사를 썼으므로), 그들이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 알려진다는 것이 세상에 화려한 조명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또는 많은 돈을 벌거나 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었다(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아픔을 함께 하거나, 불의에 굳건히 맞서거나, 별로 주목받지 않을 일을 평생 하거나, 그런 사람들의 부고였다.
바로 두 번째 책 《함께 가만한 당신》을 읽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한 기사를 찾다 최윤필의 기사를 읽었다. 아직도 그런 기사를 계속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부고 같은 기사를 엮은 책이 바로 《가만한 당신 세 번째》다(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여기에 실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여전히 빛나는 삶은 산 사람들보다는 낮은 데서 일하고,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주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부제를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넓힌, 가만한 서른 명의 부고”로 적고 있는데(이걸 다 읽고야 발견했다), 맞다. 이들은 대체로 ‘인간다움’이라는 걸 좁게만 해석하고 배척하려는 사람들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여성으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성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좀 다른 사람으로서 당당히 세상에 나서서 스스로를 옹호하고 그 권리를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는 충부히 주류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면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쉬쉬하며 넘어가는 불공정한 처사에 과감히 폭로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있다.
내가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은, 이 서른 명 중 ‘벤 바레스’밖에 없다. 여성으로 태어나 뛰어난 과학자로 인정받은 후에야 다시 남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일찍 죽은 신경생물학자다. 자서전을 통해서 알게 된 그 말고는 나의 인식체계에 나머지 스물 아홉 명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좀 부끄럽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다는 건 그 부끄러움을 아주 조금 감출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내 삶의 동력을 삼을 수 있다면, 그 삶이 조금이라도 남을 위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가만한 당신’들의 삶과 그 기록은 너무나도 소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