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가 《결혼식 가는 길(To the Wedding)》을 발표한 것은 1995년이었다. 에이즈에 걸린 한 젊은 여인이 절망과 혐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통과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나는 ‘극복’이라는 단어를 몇 번 썼다 지웠다. 절대 극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경은 1993년쯤이라고 한다. 니농은 프랑스의 철도 신호수로 일하는 장 페레로와 체코의 프라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즈데나가 만나 낳은 딸이다. 즈데나가 프라하를 떠난 사정은 역사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니농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프라하 시민들이 인권과 시민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체코로 떠나버리고 만다. 민주화의 좌절이 장 페레로와의 만남과 딸 니농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면, 민주화의 소식은 오히려 가족을 해체해버리고 말았다.
성인인 된 니농은 지노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입술에 난 상처 때문에 병원을 찾아간 니농은 뜻밖에도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듣는다. 몇 해 전 하룻밤을 보낸 남자에게서 옮은 것이었다. 니농은 지노에게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알리고 헤어지려 했지만, 지노는 오히려 그녀에게 청혼한다.
딸의 결혼식이 열리는 베네치아 근교의 마을로 아빠인 장과 엄마인 즈데나가 온다. 장은 자신이 일하던 알프스의 마을에서 오토바이로, 즈데나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어떻게 거기로 갔을까?) 버스를 타고. 그들의 만남과 슬프지만 행복한 결혼식을 지켜보는(?) 인물은 맹인 타마 장수다.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시점이 자주 흔들리면서 집중해야만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다. 주로는 맹인 타마 장수의 시선에서 과거와 현재가 들쑥날쑥 연결되지만, 중간중간 종종 니농의 시점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특이하지는 않지만, 매우 불행한 사태, 안타까운 상황을 별로 극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지금이야 에이즈는 거의 만성질환처럼, 약을 먹으면서 평생 관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질병이 되어가고 있지만, 1990년대 에이즈의 판정은 바로 사망 선고와 같았다. 전염의 공포에 가까이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은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만, 선입견은 여전하고 알게 모르게 차별이 있다. 존 버거는 천형과도 같은 질병을 선고받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믿은 청년들의 의지를 건조한 문체를 통해, 아주 뜨겁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