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크 뷔야르의 소설은 역사 이야기 같다는 느낌보다도, 더 인상적인 게 여러 조각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날의 비밀》, 《7월 14일》 모두 특별한 주인공 없이 그날, 그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어떤 읽을 겪게 되었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모인다.
《대지의 슬픔》 역시 소설과 역사의 경계에 있다. 없던 이야기를 가공한 소설이 아니다.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소설일까? 에리크 뷔야르는 결코 자신의 글을 ‘소설’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왜 그의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장르에 포함시킬까? 그건 아마도 꾸밈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단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여 거기서 교훈을 찾는 게 아니라, 역사 속의 단편을 전하되, 그 단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낸다. 그건 어떤 꾸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그 생각은 어떤 것에서 연유했는지 등등 바로 거기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고,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장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지의 슬픔》은 《그날의 비밀》이나 《7월 14일》와는 좀 달리 분명한 주인공이 존재한다. ‘버펄로 빌’로 불렸던 사나이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한때 대중오락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창시했던” 인물로 일컫는 인물의 삶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지의 슬픔》이다. 버펄로 빌은 운디니드 ‘전투’(실제로는 ‘학살’이었지만, 그는 한사코 ‘전투’라 했다)와 같은 것을 무대에 올렸다. 기병대와 인디언의 전투를 쇼로 재현했다. 여기에는 초창기 쇼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 인디언의 수난사와 같은 사회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까지 만들 정도로 인기가 높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결국에는 자신의 명성에 짓눌려 쓸쓸하게 저물어 간다는 삶에 관한 이야기까지 있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스펙터클은 세계의 기원이다.”
그러니까, 에리크 뷔야르는 ‘스펙터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단지 한 인물의 삶을 통해서 무언가 교훈을 주고자 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버펄로 빌을 택한 이유는 바로 그가, 현대적 스펙터클의 창시자와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스펙터클은 로마 콜로세움과 같은 데서도 볼 수 있었던 아주 오래된 것이긴 하다. 다만 현대의 스펙터클의 원형을 버펄로 빌의 공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세계의 기원’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는 스펙터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스펙터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뒤흔들고, 우리를 앞으로 떠밀고, 우리의 확신을 박탈하고, 우리를 불태워야만 한다. (중략) 스펙터클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뭐라 하건 우리를 불태운다. 그것은 우리를 농락하고, 기만하고, 도취시키며, 우리에게 온갖 형태의 세계를 제공한다. 그리고 때로는 무대가 이 세계보다 더욱 존재감이 크고, 우리의 삶보다 더욱 현존하며, 현실보다 더욱 감동적이며 개연성이 있고, 악몽보다 더욱 무섭기도 하다.” (19쪽)
그러니까 에리크 뷔야르가 보기에 스펙터클은 세계를 보여주는 모든 방식 전체이며, 나아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