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내가 제일 관심을 가졌던 건 노벨 생리의학상이긴 했다). 노르웨이 소설가 욘 포세. 잠깐만 들어봤던 이름인데... 아닌가? 내가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봤다고? 그럴 리 없어. 그래도 왜 이름이 알 듯 모를 듯 익숙하지? 그렇다 이미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대출해놓고 있었다. 아직 읽지는 않은 채 사무실 탁자 책 무더기 가운데 놓여 있었다. 어디서 이 책에 대해서 들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 내 수중에 있는 거다. 바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는 요한네스의 탄생 장면에서 시작된다. 딸을 낳은 후 기다렸지만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자식이었다. 아버지 올라이는 태어나는 아들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을 준다. 요한네스. 그리고 어부로서의 삶을 살기를 단정한다.
그리고는 바로 요한네스의 죽음의 장면으로 넘어간다. 한평생의 삶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하루가 금방 저 버리듯 지나가 버렸다. 삶은 고단했다. 매일 아침 속의 것을 모두 다 게워내야 할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기도 했다. 평생의 친구가 있었고, 젊었을 적 첫사랑을 이루진 못했지만, 착한 아내와 가정을 이루었고, 평화로운 삶을 보냈다. 일곱 자식을 보았고, 셈이 잘 되지 않을 만큼의 손자도 두었다. 아내는 몇 해 전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갔다. 잠든 사이에 죽은 것이다.
요한네스는 이미 죽은 평생의 친구와, 첫사랑 여인과, 아내와 만난다. 그들이 분명 살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별 것 없는 대화다. 평생의 삶을 회상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상시처럼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막내 딸을 본다. 그러나 딸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도 못한다. 그를 통과해서 지나쳐간다.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는 아버지 집을 찾아가던 딸도 무언가를 느낀다. 그리고 역시 잠든 사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한다.
요한네스의 삶과 죽음은 허무하지 않다. 그렇다고 뭔가 거창하지도 않다. 그저 살아가는 것처럼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만 기록된다고 한다면 뭔가 억울한 것 같지만, 사실 결국 그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남는 게 있다. 그 남는 것은 내 평생의 삶이 결과다. 그것을 굳이 기록하고, 강요하지 않더라도 남는다. 삶은 허무하지 않다. 성실한 삶은 눈부시다.
한 열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도 몰랐다. 이 소설에는 마침표가 극히 드물다. 쉼표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없이 단어가 이어지기도 한다. 뭐랄까? 인생에 마침표라는 게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쉽게 찍을 수 없는 게 마침표라는 것인가?
어떤 글을 쓴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 작가, 욘 포세라는 작가에게 어떤 평가를 해서 그 상을 주었는지도 읽어보지 않았다(앞으로 읽어볼 작정이다). 그런데 이 짧은 소설을 읽은 나의 소감은, 이런 주제를 오랫동안 탐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남겼다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