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을 읽으면 김훈을 느낀다. 하나마나 한 소리인 줄 알지만, 그렇다. 김훈이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역사와 인간살이가 김훈이라는 사람이 쓴 문장으로 전해지는데 더 이상 김훈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닐 수 없다(김훈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허무주의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장을 모방하게 되는데, 결국 그의 허무주의를 동경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아주 오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시원기》니 《단사》니 하는 게 있을 수 없고, 여기의 초니 단이니, 월이니 하는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나라와 연관될 리도 없다. 말하자면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과 같은 역사 소설과는 완전 결이 다르다. (문자를 멀리한) 초와 (문자로 역사를 기록했던) 단은 어쩌면 야만과 문명을 상징하고, 어느 역사 시기에나 존재하는 이웃한 두 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역사 속의 여러 국가, 민족이 떠오르고, 심지어 20세기, 21세기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세력도 연상되지만, 결국은 어디에도 없는 나라다.
더군다나 말의 이야기라니. 김훈이 이미 《개: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과 같은 소설을 통해 동물의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이번은 말이다. 북방의 신월마(新月馬) 혈통의 토하(吐霞)와 남방의 비혈마(飛血馬) 혈통의 야백(夜白). 마치 무협지 속의 이름들 같은(김훈의 아버지는 무협소설가였다!) 이 두 혈통의 말은 자신의 전설을 이어왔으며 결국 잠깐 스치듯 만나 교접을 하고, 생의 마지막에 재회한다. 소설가는 ‘문명과 야만이 뒤엉킨 모습과 거기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을 이야기하였으니, 초와 단은 문명과 야만, 토하와 야백은 생명의 힘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생명도 결국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다. 과연 그런 것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결국 역사와 말의 마음을 겹쳐 놓았는데(그래서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다), 절대 교묘하지 않다. 교묘하다면 사람들이 홀딱 속아 넘어갈 텐데, 이 소설은 그냥 소설이라 스스로 이야기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김훈 소설에서 스토리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스토리만을 따라가서 그 구조의 치밀함에 감탄하고자 한다면 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시원기》와 《단사》가 허술하기 그지없고, 역사 아닌 사람들의 전하는 말로 전해온 이야기들에 논리와 앞뒤가 없듯이 여기의 이야기도 치밀하지 않다. 대신 김훈의 생각만이 치밀하게 문장을 타고 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문장 하나를 옮긴다.
“땅 위의 금은 지울수록 더욱 드러난다.”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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