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맨 처음 읽게 되는 것은 사실 나로서도 별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의 작품 목록에서 대표작으로 앞서 꼽히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이런 작품이 있다고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특한 상황에서 비어 있는 시간.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가운데 눈에 띠는 책 가운데 그의 책은 이거 하나뿐이었다(이미 다른 사람이 빼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연히 나의 오에 겐자부로의 첫 책이 되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막 신진 작가를 벗어나 이름을 얻어가던 오에 겐자부로는 한국에서 벌어진 김지하 시인 지원을 위한 일본 작가들의 단식 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시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장소에 영화제작자가 된 대학 시절 친구 고모리가 나타난다. 대학 다닐 때도 잠깐 교류가 있었을 뿐이었고, 졸업한 후로는 전혀 연락이 없던 그가 아역 배우로 유명해고, 이후 미국과 멕시코 등에서 배우 생활을 했던 사쿠라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고모리는 사쿠라가 출현하기로 한 국제적 영화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오에 겐자부로에서 일본 측 영화 시나리오를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원래는 한국에서 김지하가 담당할 계획이었지만, 한국에서의 사건으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미하엘 콜하스 영화’, 또는 ‘M 계획’이라고 불리는 영화 제작 프로젝트였다.
독일의 민중 봉기 이야기를 메이지 유신 전후 오에 겐자부로가 태어난 지역에서 전승되던 이야기이자, 오엔 겐자부로의 어머니가 주도적으로 연극으로 만들었던 ‘메이스케’ 이야기로 번안하여 영화화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큰 사건은 없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영화 촬영에 들어가려는 시점에 촬영 팀에서 문제가 생겼고, 영화 촬영은 무산되었다.
사쿠라는 그래도 영화에 미련이 남았는데, 그 미련을 고모리가 좌절시킨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 시절 사쿠라의 후견인이자 나중에 남편이 된, 당시 일본 점령군의 일원으로 일본에 와 있던 미군(문화 쪽 일을 담당했지만) 데이비드 마거섁이 찍은 ‘애너벨 리 영화’ 때문이었다. 청소년 시절 영화를 보았던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영화에 대한 기억이 이중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중적 기억이 모두 옳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사쿠라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남편이 어린 소녀인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았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사쿠라가 겪는 악몽의 원인이었으며, 정신병의 원인이었다.
30년 후, 노벨문학상을 받고, 이제 일흔이 넘은 나이의 오에 겐자부로앞에 고모리가 다시 나타난다.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고모리와 사쿠라는 30년 전의 영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이 소설은 오엔 겐자부로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쓴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5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암시하는 내용도 없다. 그런 스케일도 아니다. 소설 작업을 하다 생을 마칠 수도 있는 나이와 건강 상태에서 짧게 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분명 원숙함과 함께 피곤함을 함께 느낄 수는 있었다. 30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뛰어넘으면서도 그것이 단절되지 않고, 마치 어제 일처럼 만들어버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단락과 맺음에 대한 기술이 노련한 솜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가 직접 쓰고 있듯이 ‘새로운 형식’이라면 다시 쓰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랜 글쓰기에 지친 모습도 엿보인다.
그러나 그런 원숙함과 피로함을 뒤로 하면, 소설에서 많은 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 읽는 사람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삶에 주목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 속 영화, 그리고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는 것이 바로 ‘봉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이 대항했던 미군이 일본을 점령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봉기, 내지는 저항이라고 할 만한 것이 단 한 건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 일본이다. 그럴 만한 원인이 되는 것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쿠라가 겪은 성적 훼손을 들 수 있다. 이건 개인적인 것이고, 사소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런 사례는 무척 많았을 것이며, 그것 말고도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도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복종을 미덕으로 미국 지배 체제 아래 말 없이 편입되어 갔다. 오에 겐자부로는 전후 자신의 어머니가 맡았던 역할을 배경으로 ‘봉기’의 의미를 자꾸만 되뇌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흔히 일본의 평화주의와 진보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았었다. 그는 죽었고, 그의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만 그의 양심은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