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살고 있는 아이 한명. [아디티]. 이 아이는 눈에 병이 있어서 눈을 한번도 활짝 떠본 적이 없습니다. 간단한 수술이면 좋아질 것인데, 열악한 환경이라서, 주민들은 그런 수술이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눈이 반쯤 감긴 채로 그냥 살아가는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시력은 점점 나빠지겠죠. 지난 번, 네팔 지진 구호 의료진으로 간 산부인과 원장님께서 아디티를 만났습니다.
‘수술을 해줘야겠다.’
산부인과 원장님께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하다보니, 네팔에서 한국의 장기려박사와 같은 인술을 베푸시는 안과의사를 만났습니다. 네팔에 스리랑카병원의 루이트 박사. 막사이사이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흔쾌히 아디티의 눈을 루이트박사님이 무료로 수술해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골짜기에서 사는 아이에게, 서울의 명동 사거리 지하철 1번출구로 나오면 된다는 식의 설명은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를 붙이고, 한국어를 할 줄아는 길안내자를 찾아서 아이와 함께 가족의 동의를 얻어서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오는 프로젝트를 실행했습니다. 그 결과 아디티의 눈이 좋아졌네요.
(이 아디티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은 지난번 네팔 돕기 모금할때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내주신 1만원, 2만원등의 돈을 모아서 수술시 교통비, 숙박비, 안내자비용 등 부대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아디티의 눈이 좋아지는데, 모든 일은 산부인과 원장님이 뛰어다니시면서 해결하셨으며, 저의 주변 여러분의 따뜻한 몇만원의 돈들이 가치있게 쓰였습니다. 저는 그저 취재기자처럼 식사하며 이야기를 들은 것 뿐 아무 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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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 통장에 네팔 지진을 위한 입금자명이 적혀있어서, 제가 가진 작은 노트에 옮겨적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빚을 진다는 마음으로 적습니다. 몇몇의 분들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익명.’ 등등의 이름으로 보내셨더군요. 참으로 대단하시고, 빚을 나중에 기회가되면 갚겠다고 이름을 적는 저로서는 다소 야속하기도 하고 하였습니다.
산부인과 선생님께서 네팔이나 오지의 아이들이 굶는 것을 돕고 할때, 저는 ‘그래, 그렇게 생명만, 숨만 붙여놓아서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힘든 것이 아닌 것처럼, 저는 생명 이후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산부인과 원장님 본인도, ‘당신은 왜 남의 돈으로 착한 일 하고 생색을 내십니까?’ 하는 비난으로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어디에 써야 적합한 것인가에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지진으로 직접적인 상해를 받은 사람을 위해 쓸 것인지, 아니면, 아디티의 눈을 고치는데 보태도 될 것인지..
아디티의 수술이 끝나고 메일로 보내온 수술 후 사진을 보니, 저 역시 기쁜 마음에 웃음이 납니다. 네팔에서는 남존여비가 강해, 아내가 맹장염으로 응급한 상황이라고해도, 남편의 허락이 없다면 병원에가서 남자의사에게 몸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런 네팔에서 아디티의 수술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친구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후원금, 그리고 기타 다른 지인분들의 도움으로 네팔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다녀오신 권현옥선생님으로부터, 많은 현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돈의 사용처를 하나 둘씩 알려드리는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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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날씨도, 다 낡은 집 지붕도, 떨어지는 풀잎도, 이제는 맑은 눈으로 아름답다고 볼 수있는 아디티의 미래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간 깨끗하게 세상을 잘 보여준 나의 두개의 눈에게도 새삼스레 감사를 해야겠습니다.
아마 수년뒤 저에게 눈이 침침해지는 노안이 오면, 저는 진료를 보며 불만에 가득 찰런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퇴화해가는 제 신체를 스스로 서글퍼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