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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 May 09. 2018

[ 너는 귀가 처 먹었냐! ]

치과에서 울고 웃다.

동생놈 하나가 저를 무시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제가 기분을 맞춰주려고 머리를 짜내 유머를 해줘도 딴 곳만 쳐다보고.. 원래 착한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 뭐가 빈정이 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저혼자 속이 터져서 자다가도 뒤척이다가, 그래, 내가 전에 그 놈한테 한 농담이 심한 것도 있던 것 같아. 그렇다고 불러도 대답도 잘 않는건 좀 매너가 아닌데? 내가 수년간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말야.. 고민고민하다가, 혼자 생각합니다. 100년 뒤에는 없어질 몸인데, 우리네 인생에서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싸움따위는 부질없는 것이고, 그냥 오해를 풀고 내가 먼저 사과하자. 용기를 내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뭐 잘못한 거 있니? 맘 상한거 있다면 내가 미안해. 사과한다.”

“아.. 형.. 그게 아니구요.. 제가 한 쪽 귀는 청력을 잃었구요.. 다른 한 쪽도 좀 안들리기 시작해서요.. 보청기를 끼워야하는데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좀.. 의사샘도 걱정해주시더라구요. 죄송해요. 그래서 제가 입모양을 보지 않으면 말을 잘 못알아들어요. 형 미안해요.”

어느날인가 치과에 대학생 환자가 왔었습니다.

“아~ 원장님, 제 안경요? 그냥 안경알이 없이 멋으로 쓰는거에요. 좀 지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안경 벗고 치과치료받을까요?”

안경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참 관대합니다. 귀가 안들리는 것이랑 다를 것이 없는데, 눈이 침침한 것은 오히려 그가 책을 많이 읽어서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많은 연극배우들이 의사나 변호사를 연기할때 필수아이템은 안경이지요. 반면에 보청기하는 젊은이는 대부분 머리를 덥수룩하게 길러 귀를 덮습니다.

그 귀가 안들리는 청년을 장발로 만든 것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완벽하지 않아보이는 외형을 보면 찡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발음이 조금만 어눌해도 뒤에서 수군거리고, 버스에 오르는 느릿느릿한 노인을 보고서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저 사람때문에 차가 늦어지는군.’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더 불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것은 소수의 희생으로 공공의 이익을 최대한 증진해야한다는 의식이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주입된 까닭입니다. 장애인의 10명중 9명은 후천적 장애이며, 결국은 우리도 노인이 될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근시안적인 사고입니다.

보청기를 낀 할아버지 [사진1] 께서 치과진료의자에 눕습니다. “양쪽을 다 끼워야 좀 잘 들려요. 치료할 때 크게 말씀해주세요. 원장님..” 저는 귀에 대고 크게 소리를 칩니다.

“마취할거에요! 좀 아플거에요!”

좁디 좁은 치과에서 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다른 치과진료의자의 환자들에게 좀 저 스스로가 민망해집니다. 할아버지 귀에는 개미소리만하게 들리겠죠. 할아버지도 민망하셨는지 키득키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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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난청의 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아들이 친구들을 만나면 의기소침해 할까봐, 보청기에 멋스러운 만화디자인을 넣어서 만들어준 이야기가 화제입니다. [사진2] 저도 자식을 낳아보니, 그 사진의 보청기에서 어머니의 마음이 보이네요. 아이가 값비싼 보청기를 끼우는 엄마의 마음은 늘 비가올까 걱정이랍니다. 작은 물방울에도 보청기가 쉽게 망가져버리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무얼 알까요. 엄마는 그저 잔소리로 모자있는 옷을 입혀주고, 비가오면 얼른 모자로 보청기를 가리는 법만을 가르칠 뿐입니다. 들을 수 없으면, 발음도 잘 배울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했었습니다. 보청기를 잘 보이게 만들어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아.. 이 분은 귀가 잘 안들리는구나, 그렇다면 좀 더 크게 말해주고, 배려해줘야겠다. 그러니 보청기에 파란색을 칠해서 잘 보이게 귀를 감싸게 만들어주자..’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 스스로 장애라는 불편감을 이겨내야하고, 자존심을 다독거려야하고, 스스로의 장애를 인정하는 경지에 올라야할 뿐만아니라, 가장 힘든 주변사람들의 편견과도 싸워야합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아마도 그런 편견을 내려놓으려 애쓰려는 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관우야, 네 아버지 보청기 맞춰드려야 할 것 같아. 안그래도 표정이 늘 무뚝뚝하신데, 사람들 모였을때 안들리니 더욱 표정도 굳어지고, 어디 화난사람같아서 안되겠어. 다른 사람이 농담을해도 웃지를 않으니, 영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어. 말한 사람도 민망하고 말야.” 어머니의 말씀에, 디지털보청기니, 장애등급을 받네 마네 하며 시간을 보냈던 일이 생생합니다. 이젠 두 분 다 세상에 안계시니, 잘 들리지도 않는 남의 말을 애써 들으려하지 않아도 되어 도리어 편안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들을 것인가?‘하는 거창한 생각을 해봅니다. 귀는 뚫렸으되, 마음은 닫혀있다면, 그것이 더 답답한 일입니다. 귀는 덜 들리더라도, 생각이 열려있다면 그것이 훨씬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겠지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한번쯤은 그사람은 왜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내가 너무 한쪽으로 편향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보청기가 오히려 더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봉쇄된 사람을 많이 보게됩니다. 무섭기까지합니다.
 

 김민망씨는 모임이 있을때, 갑자기 보청기배터리를 교체해야해서 화장실같은 곳에 가서 몰래 보청기배터리를 교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해야만하지?‘ 하는 의문에 빠졌다고 합니다. 저도 생소한 상황이라서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 댓글로 의견을 여쭙습니다. 은밀한 곳에가서 교체하는 것과, 안경을 닦듯이 남들 앞에서 배터리를 스스럼없이 교체하는 것. 어떤 것이 상식이 되어야할까요? 어떤 분이 공공장소(식당, 공원등)에서 보청기의 배터리를 교체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의없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냥 안경을 닦는 행위처럼 받아들여줘야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보청기를 한 어린이. 웹에서 퍼온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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