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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 May 09. 2018

[고 박승복 큰이모부를 기리며]

 며칠 전, 꿈 속에서, 비포장도로인 흙길에 먼지를 날리며 검은색 도요타승용차가 우리집으로 간장박스를 싣고 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저 대수롭지않은 지난 기억이겠거니 했습니다.

과거 샘표간장의 오너였던, 이모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지금의 회장인 이모부의 아들인 진선이형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모부는 내 인생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시는 분입니다. 크지는 않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간장회사를 운영하면서, 성북동의 커다란 주택에 사시면서 어딘지 기품있는 모습을 늘 보이셨습니다.

이모부는 참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저희 집에 늘 신제품이 나오면 기사를 시켜서 검은색 도요타자동차트렁크에 가득 실어서 기사를 시켜 저희집에 보내셨더랬습니다. 시험삼아 만들어본 세제도 있었고, 출시되지 않은 테스트제품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간장만 만드는 회사인 줄로 알았는데, 그땐 신기했어요.

 95세라는 장수의 비결을 여쭈어보니, 하루에 세 번, 식초를 묽게 물에 타서 마시는 습관때문이었답니다. 생전에 제게 양조식초를 늘 묽게 먹으라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늘 검소하시고, 기업의 총수같지 않은 모습에 저도 검소하게 사는 것에 대한 선망이 생겼습니다. 이런 말은 좀 우습지만, 어릴 때부터 저에게는 이런 건방진 생각이 생겼습니다. 주변에 돈 좀 있다는 부자들이 늘 좋은 차, 좋은 집, 무엇을 해서 재테크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딘지 저는 이모부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이름난 회사의 회장인데도 늘 검소하고 겸손한데, 어떻게 저렇게 동네에서 돈 좀 있다고 으스대는지 모르겠다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이모부는 늘 품질이 좋은 양복을 딱 몇벌만 사서 그것을 단정하게 입으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늘 좋은 식품은 만들겠지만, 돈 벌려고 애쓰는 회사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우야, 왜 이렇게 연락을 안하니. 자주 연락 좀 하고 지내자.”

장례식장에서 지금의 샘표 CEO로 있는 진선이형이 말씀을 하십니다.

“형이 너무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 연락하기가 쉽지 않네요. 어렵잖아요. 형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십니다.

“이리 들어와 봐.”

장례식장 한켠의 룸에 들어가서는, 
이가 아프면 너가 사는 곳으로 내가 가야겠다. 하는 농담도 하십니다.

 제가 사랑하는 저의 아버님은 이모부의 사회적 역량에 필적할만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동네에서 흔히 만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셨지요. 아버지의 인품에 반해서 결혼한 저의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많은 마음고생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어느정도 비슷해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데, 아마도 서로가 그렇지를 못하니 중간에 있는 죄없는 어머니만 의기소침해지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이모가 언니로써 저의 어머니를 늘 보듬어주셔서, 그것을 보고 자란 제가 오늘 장례식장에서 촌스럽게 울었나봅니다.

이모부께서 돌아가시기 전, 이모부에게 가족들이 물어봤답니다.

“아버님, 일생에서 언제 제일 행복하셨어요?”

“응, 나? 내가 제일 행복했던 때는, 젊은 시절, 우리 어린 진선이, 유선이 그렇게 자식들 데리고서, 아내와 처음으로 집을 장만해서 입주하였을 그 때였어. 그 시절이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지.”

그 화려한 인생을 사신 이모부도(많을때는 직함이 30여개가 되었습니다. 재무부 실장,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 경총 부회장등) 결국 삶을 뒤돌아보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높은 직함이 아닌, 사랑스러운 가족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제게 준 말이었습니다.

제가 어려운 시절에, 이모가 학비를 지원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모, 이 은혜를 제가 나중에 갚겠습니다.”

“아니다, 관우야. 그냥 너는 네가 잘 되면, 나중에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보이거든, 그 사람들에게 이 작은 것들을 갚아주도록해라. 그게 곧 나에게 갚는거야.”

이런 말들은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샘표는 사원복지가 아주 잘 되어있는 회사입니다. 이모부는 회사를 운영할 때, 직원들에게 노조를 설립하라고 권장하였던 분입니다. 역시 ‘내 가족이 못먹는 음식은,남에게 만들어 팔지 말자.’ 는 신조로 일생을 사셨지요.

이모부는 전쟁이 일어나 마산으로 피난을 갔을때에도 가진돈과 은행예금을 직원에게 골고루 나누어줘 “살아서 만나자.”고 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이 직원들이 다시모여 다시 공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1960년대 말, 맥주병을 손으로 씻어 간장을 담았는데, 이 공병세척부에서 일하던 이들은 40~50대의 비정규직 아주머니였습니다. 병을 씻는 기계가 도입되자, 바로 전날 저녁, 이 아주머니들을 정식 사원으로 발령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감원이나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사람을 중시하는 회사입니다. 1980년대에는 늘 5시 반이면 직원들을 퇴근시켜, 샘표공무원이라는 별칭도 붙었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저 좋은 브랜드로 왜 더 큰 매출과 기업확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은 더 큰 매출액을 올리고, 더 유명한 제품으로 히트치는 것을 인정하니까요.

나이가 드니, 조금 생각이 바뀝니다. 좋은 제품을 양심적으로 생산하고, 직원과 하청업체에 대우해주는 회사. 그런 회사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곳에서 살고 있으면서, 이 곳에 소신을 가지고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더 화려한 인테리어, 더 큰 매출, 더 공격적인 광고들을 추구하기 보다도,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좋은 음식, 좋은 상품을 공급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눈에는 너무나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20평도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미안할 정도로 땀을 흘리며 좋은 음식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대한 기업세계에서 아마도 샘표식품은 제가 사는 곳의 자그마한 식당과 같은 위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직원을 위하고, 소비자에게 좋은 음식을 공급하고, 거래하는 업체들을 존중하는 운영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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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썼습니다. 그동안 가슴깊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아마 없었나봅니다. 그만큼 나태하게 산 것이 아닌가하고 매일 반성하고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면서 진선이형의 형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하나요’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째. 많이 사랑해줘라. 둘째, 관우 너가 ‘자식이 이런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인간형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인간형으로 네가 너의 삶을 살아라. 그럼 어느샌가 자식이 그렇게 너가 바라는 인간형의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의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마라. 한발짝 떨어져서, 그를 응원하여라.”

진선이 형의 형수님은, 사실 타고나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서울대를 수석졸업하고, 여자로서 스탠포드 대학에서 2년 반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해외에서 제자로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네요. 그런 분이랑 나랑 삶 자체가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양육방식은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서둘러 아내와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내내 하신 말씀을 곱씹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아이들이 뛰어와 안깁니다. 씻고나서 수건도 아무데나 휙 던지고, 양말도 대충 휙 집어던지던 제 습관을 다시 돌아보면서, 수건도 좀 더 가지런히 걸어두고, 양말도 빨래통에 조심스레 넣으면서, 내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더 애써야겠구나. 하는 것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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