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읽고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하얀 성』에는 터키에 포로로 끌려와 노예가 되는 베네치아인 주인공과, 호자라는 터키인 학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외적·내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며,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자아를 직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마법 같은 동일시를 경험하고, 작품의 결말부에서는 서로의 옷을 바꿔입은 채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게 된다.
사실 읽기가 쉬웠던 작품은 아니다.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워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페이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읽어보면서, 이 작품이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고차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성』 속에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대한 문제, 그 사이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미시적으로는 각자의 삶 속의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이 던지는 이 모든 논제에 관해서 과연 나는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0. 『하얀 성』의 저자 오르한 파묵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등을 주제로 작품을 써 온 오르한 파묵(1952~)은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품의 모티프 중 대부분을 터키 역사에서 구하는데, 그 착상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이다. 또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탄탄하고, 그것을 엮는 구조가 짜임새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얀 성』은 1986년에 쓰여진 작품이며, 누군가가 옛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원고라는 설정의 역사 소설이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후기를 통해 자신이 『하얀 성』의 시간적 배경을 17세기 중반으로 정한 이유는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적합하고 색채감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본인의 다른 저서인 『빨강의 눈』에서는 “동·서양 문제를 두 인물의 주인-노예 혹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형시키고, 그들을 한 방 안에 넣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했다”고 이 작품을 소개한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 중에는 동·서양의 문화 충돌과 그 극복 과정을 주제로 다룬 소설이 많다.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터키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문화와 동방 문화가 교통하는 길목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터키인인 그에게는 양방향에서 유입되는 문화로부터 정체성을 찾는 것이 늘 중요한 화두였다. 『하얀 성』에는 작가 본인의 이러한 고민과 작품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1. ‘하얀 성’의 의미
가장 깊이, 또한 폭넓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주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얀 성’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었다. ‘하얀 성’은 거대하고 강력한 ‘무기’를 이기는 장면을 통해 서양의 문명, 전쟁, 기술 등의 가치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기존의 발제문에서는 이 성을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운명’으로 해석했으나, 수업 중 토론을 통해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 보다 깊은 주제, 동시에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정리해보았다.
a. 동서양의 합일점, 이상향으로서의 ‘하얀 성’
폴란드인 외에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 그리고 카자흐인들까지 수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성을 바라보았다. 성안에 동양과 서양의 지원군이 함께 모여있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위의 대목은 ‘하얀 성’이 즉 ‘동‧서양이 합일을 이루고 있는 완전한 이상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하얀 성’은 서양의 기술을 동원해 만든 무기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거대하고 강력한 무기는 서양의 문물과 그들의 논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파묵은 어떠한 문화도 다른 문화의 상위‧하위문화가 될 수 없으며, 무력과 전쟁으로는 갈등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룩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결국 ‘하얀 성’은 파묵이 수많은 작품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의 극복, 결합, 일치가 이루어진 이상적인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성은 특정한 문명에 기반한 공격에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백색’이라는 시각적 요소 역시 어느 색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색이라는 미술적 요소를 통해 이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b. 도달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하얀 성’
토론을 진행하며 주목한 점은 ‘하얀 성’이 호자와 주인공의 다음 행보의 어떠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호자와 주인공은 그들의 이상향인 ‘하얀 성’을 정복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이 온전한 합일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의 옷을 바꿔입고 각자의 도시에서 존재를 바꾸어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합일의 차선책인 ‘교체’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두 인물의 선택은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이질적인 두 종류의 문화, 문물, 사람이 완전히 결합하기란 얼마나 어려우며, 우리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여전히 아름답고 굳건하게 서 있는 하얀 성의 모습은 이상향은 이상향으로 남아있을 때 영원히 아름답다는 사실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과 결말부의 여운은 『하얀 성』이 가진 소설적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2. 동·서양을 구분 짓는 오래된 고정관념
-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학문을 탐구하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 중에는 동·서양의 문화 충돌과 그 극복 과정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다고 한다. 그는 작품 후기를 통해 직접 “동서양 문제를 두 인물의 주인-노예 혹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형시키고, 그들을 한 방 안에서 넣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했던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동서양의 구분의 명확성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주인공과 호자는 각기 다른 성장 배경과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토론과 논쟁, 서로의 유사성과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의 삶 속에 녹아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성장 서사를 통해서 동서양의 구분, 국가적 정체성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이 문제는 현재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보다 어느 나라가 우월하고, 어느 문화보다 어느 문화가 더욱 뛰어나다는 식의 판단으로.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는 구시대적이고 차별적인 발상이지만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보면 나의 무의식 속에 이러한 고정관념과 차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된 뿌리 깊은 고정관념과 차별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긴 여운이 남는다.
소설 속에서 호자는 서양의 학문을 동경하며, 터키인들의 무지함을 경멸한다. 그는 동양인을 ‘그들’이라고 칭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변별하고, ‘그들’과 같은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는 주인공을 자신의 학문적 동료로 둠으로써 그에게 모든 지식을 가르쳐준, ‘머릿속 지식의 서랍’을 채워준 서양 학자의 생각을 배우고 싶어한다. 호자가 서양을 선망하고 그들의 학문을 앞서서 배우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작가의 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묵은 “선을 추구하고 악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그리고 싶었으나, ‘선’, 그리고 주인공에게 행동개시를 하게 만드는 모든 지식과 발명의 흥분 원천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며 결국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선망 때문에 서양에서 온 누군가로부터 과학을 배우도록 설정했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학교에서,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내 나라에서 가르치는 모든 천문학, 의학, 공학 등 학문, 그리고 내가 듣고 본 모든 것과 강, 호수, 구름, 바다에 관한 내 생각도.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이 치는 이유도......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는 별과 행성이 가장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호자는 이제 ‘가르치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연구해야 하며, 함께 찾아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터키의 문화를 접한 주인공은 호자와 대비되는 반응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파디샤를 멍청한 아이라고 깎아내리던 호자의 말과 다르게 그가 젊고 총명한 성군이라고 느끼며, 터키의 화려한 궁정 생활에 쉽게 적응한다. 그는 자신이 ‘인생과 세상과 자신에게 만족해하는 바보들처럼’ 안일한 눈빛을 가지게 되었음을 깨닫지만, 곧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게 된다.
주인공과 호자가 보여주는 정반대의 시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동양과 서양은 지리학적·문화적 기준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에 대해서 “동·서양의 구별은 인간과 문화를 구분하기 위해 행해졌으며, 이러한 구별이 실제로 얼마나 적합하냐는 것은 『하얀 성』의 주제가 아니다. 이 구별에 대한 흥분으로 수백 년 동안 행해진 그 많은 환상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을 존재케 하는 색채의 대부분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단지 내가 비밀의 일부만을 알려주려고 했던 어느 허구의 모험 중에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색채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 불가피하게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우월성을 함부로 따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호자와 주인공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또 서양에서 동양으로 녹아들고 적응하는 모습을 통해 그 경계의 무의미성을 보여준다. 덧붙여, 주인공과 호자가 개발한 ‘가공할만한 무기’는 서양의 기술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이지만 결국 위기의 순간에서 무력해진 이 무기는, 서양이 가진 힘과 기술에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3.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가진다. 하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의 인식 모두 한 쪽의 측면에서 다른 한쪽을 향해 가지고 있는 고정적이고 왜곡된 사고를 일컫는다는 사실이다. 서양은 동양권의 문화를 매혹적이며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동양의 지배에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했지만, 동양 역시 서양 문화를 비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인식 구조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묵은 두 가지의 고정관념과 왜곡된 사고를 호자와 주인공, 이스탄불과 베네치아라는 대립되는 존재를 통해 반사적으로 드러내고 비판한다. 호자와 주인공은 서로가 가진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소설의 주제인 ‘정체성’과 유사성‘에 관한 담론이 극대화되어 생생하게 묘사된다.
4. 두 인물의 유사성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다
파묵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국가적 정체성의 갈등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을 다룸과 동시에, 개인의 자아라는 아주 미시적인 차원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기본요소는 호자와 주인공이라는 두 사람의 정신적 관계와 긴장감일 것이다. 호자가 던진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과, 두 사람이 함께 자신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모습은 이 작품이 단순히 1900년대의 터키를 넘어, 한국의 현대사회까지도 관통하는 ‘존재적 고민’을 다루고 있음을 알려준다.
호자와 주인공은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리거나,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직시해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호자와 주인공의 유사성이다. 그들은 외적으로 닮았을 뿐 아니라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증오하면서도,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며, 또 경쟁한다. 이것은 “이상한 형제애”, 혹은 “서로를 혐오하며 서로를 닮아가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두 사람이 함께 거울을 보며 서로가 ‘같은 사람’임을 깨닫는 장면은 그들이 겪는 신비한 합일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득 파샤의 방에서, 그때 나는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을 보았다. 이제는 그도 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 그는 자신이 내 영혼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마치 조금 전 내 행동을 흉내낼 때 했던 것처럼, 이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는 알 수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 그는 그 자신은 내가 되고, 나는 그가 되기를 원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는 이러한 ‘유사성 테마’에 가장 결정적이고 확실한 종지부를 찍는다. 파디샤의 원정길에서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입는다. 주인공은 그저 자신의 옷을 입은 호자가 고요한 안개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이후 그들은 서로의 역할을 뒤바꾼 채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문화권에 정착해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을 때 ‘우리 마음속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 스스로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노인이 던진 질문처럼, ‘과연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작가는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불확실한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고 말한다. 자아에 대해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성장에 대해서, 국가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이기도 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작가는 어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해주기 보다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가 자신만의 답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의 잃어버린 삶과 꿈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믿는다!”
5. 정체성과 유사성
우선 호자와 주인공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위치한 터키에서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터키, 특히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거치며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이 공존하는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터키인은 두 가지 상반되는 문명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혼란의 중심에서 유럽과 이슬람의 공존 속에서 형성되는 모순적 상황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호자와 주인공이라는 두 인물의 서사 속 질투심과 선망, 매혹, 공포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사용해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그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극복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는 바로 ‘유사성’이다. 발제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두 인물의 유사성은 서로가 각자의 자아를 성찰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학우들과의 토론을 거쳐, 이 유사성에 대한 의미와 작용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인간이 타인을 만나 경험하는 유사성은 서로가 건강한 내적 성장을 할 수 있게 도와줄 뿐 아니라, 상대와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또한 필연적인 충돌의 상황에서 쉽게 타협점을 찾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과 이를 유지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차이점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토론에 참여한 한 학우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유사함을 찾는 과정보다, 다른 부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동반자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호자와 주인공의 관계에서도, 또한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두 문화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렇듯 『하얀 성』은 두 인물의 내적‧외적 유사성이라는 지극히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비유를 통해, 현대의 터키가 겪고 있는 자아정체성의 혼란과 동‧서양의 갈등 극복이라는 거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극복과 화합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풀리지 않은 과제이다. 하지만 『하얀 성』을 통해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고민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그 힘을 다했으리라고 생각한다.
6. '나'를 찾는 여정
하얀 성에서는 국가적 정체성을 다룸과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 행복감, 자아에 대해서 다룬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호자와 주인공은 내적/외적 유사성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신비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호자의 본질적인 고민과, ‘하루종일 거울을 보는’ 서양인들에 대한 언급, 서로 마주 앉아 각자의 존재를 고민하는 호자와 주인공은 그들이 ‘자아’라는, 아주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후반부에서 파디샤와 호자, 주인공이 폴란드 원정을 떠났을 때도, 호자는 ‘그들’과 ‘그들의 머릿속’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심문의식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폭력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숨겨진, 더 깊은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호자는 부상자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에게서까지 ‘답’을 찾아내려고 하나 번번히 포기하고 만다. 작가는 호자의 내면적인 고뇌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를 직시하는 일’에는 왜 용기가 필요한가? 그리고 왜 누구도 쉽게 그 답을 찾지 못하는가?
작품 속에서는 호자와 주인공이 함께 거울을 보며 ‘우리가 같은 사람임’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그 곳에서 주인공은 “우리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호자 역시, 그 자신은 주인공이 되고, 주인공은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다소 비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이 장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결국 ‘자아를 발견하고 또렷히 바라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를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자아를 직시하는 일은 왜 중요한가? 내가 내 인생과 자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은 없었어도, 아마 자아라는 것은 과거의 내가 쌓아온 행동들의 결과로 볼 수도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나의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앞으로 가야할 길까지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7. 호자의 끈기
호자는, 나중에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들을 그 자리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별들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배움에서 아주 유용한 결론을 도출했다고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듣는 파디샤의 침묵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별들을 관측할 천문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략) 단지 별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 즉 강과 바다. 구름과 산, 꽃과 나무는 물론 동물들도 관찰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그들이 연구한 것을 토론해가며 우리의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과학청 같은 것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인공의 묘사에 따르면 호자는 습관처럼 “끝까지 가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의 “끝까지 가는 것”은 부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돈 많은 군관인 파샤의 제안과 협박을 무시했고, 본인 스스로도 “학문 이외의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식과 학문에 대한 호자의 이러한 열정적인 태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어떻게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학자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호자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는 다혈질이거나 주인공을 압박하고 괴롭히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은 인물이었지만, 작가는 호자를 통해서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지식에 대한 동경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작가는 관찰자인 주인공의 시점을 이용해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8. 타인을 이해하는 힘
작가는 호자와 주인공이 서로의 도움을 받아 각자를 이해하게 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아 성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사실 첫인상의 외적 유사성만 제외하면 그렇다 할 관련성이 없는 호자와 주인공이 ‘서로를 가장 잘 아는’ 단계까지 발전하는 과정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동시에, 호자와 주인공이 마법 같은 유사성을 경험한 것을 계기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장면은,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도 같다. 비현실적이고 마법 같은 과정이 있어야만, 도플갱어처럼 완전히 똑같이 생겨야만 우리는 우리 각자를 알 듯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아주 작더라도 수많은 공감, 동일시, 유사성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동물이듯이, 우리 스스로 아주 작은 공감이더라도 소중히 여기고 귀를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주인공과 호자가 그랬듯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뒷받침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마력에,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들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주장했다.
9. 소설만이 선사할 수 있는, 이야기의 힘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가요?”
파묵은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교과서 정답지 같은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작품의 초반부에서 결말부까지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책을 힘들게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면서도 머릿속에는 그만큼의 질문이 생겼다.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나 스스로 고민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계발서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잃어버린 삶과 꿈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다시 상상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믿는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들’과 ‘우리들’. 동양과 서양, 나와 타인 등 삶을 관통하는 이분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도 다시금 배웠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분법적 논리에 대해서도 고찰해보게 되었다. 결국 소설의 영향력은 이런 것인 것 같다. 실재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오르한 파묵은 그 누구보다 이러한 소설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10. 『하얀 성』의 결말
우리는 침착하게,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입었다. … 그러곤 천막에서 나갔다. 고요한 안개 속에서 그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의는 밝아지고 있었다. 잠이 몰려왔다. 그의 침상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잠을 잤다.
앞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면서 언급했다시피, 파묵은 그의 소설에 명확한 결론을 짓거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등장인물의 미래에 대해서 나름대로 추측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비평문에서는 기존의 발제문에서 토론을 위해 제시했던 주제를 발전시켜, 소설의 결말을 예상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보려고 한다.
호자와 주인공은 동양과 서양의 위치에서, 그리고 유사성을 지닌 두 사람으로서 온전한 합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차선책, 현실과의 타협으로써 각자의 자리를 뒤바꿔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으며, 본질적으로 사람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들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해볼 수 있다. 적지 않은 학우들이 ‘주인공은 진정한 자신으로서 행복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갈등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갈등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므로’ 그들이 결국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호자와 주인공은 간절히 서로를 향한 일체화를 지향했고, 목표가 현실에 부딪히자 서로의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문화와 문물 속에 속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택이 완벽한 정답이 아니고 그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결말은 우리가 근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형태의 합일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최적의 수단임을 비유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터키를 떠나 서양의 문화를 체화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호자와 주인공은 극명히 대립하는 두 가지 요소 사이에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일체화를 선택했다. 작품을 모두 읽은 후에 생각해보면,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은 호자와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의미하는 두 가지 문화권이 ‘얼마나 다르냐’,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차이점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체성과 특성을 가진 이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작품을 통해,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통해 호자와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의미하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넓고 좁은 모든 간극, 그리고 그 경계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모든 ‘틈새’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