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사라졌다

이 시대, 페미니즘은 무엇을 해결해 줄 것인가.

by 권도연
일 그만두고 살림이나 할까 봐.

살림이나?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던가. 하루 종일 쓸고 닦아도 티 안나는 일, 육체적 심지어 정신적 노동을 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그 대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이력서에 경력으로도 쓸 수 없는, 그래서 하다 보면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블랙홀 같은 살림살이를, 지금 그녀가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만만하다는 듯이.


"일하는 게 힘들고 상사가 괴롭힌다고 도피처로 전업주부를 선택하다가는 큰 코 다칠 거 같은데요."


평소에도 돌직구를 날리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선배인데, 기분이 나빴을 것이었다. 역시나.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꽉 잡으면서 입에 쏟아부으려던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직장에서 애 신경 쓴다고 일에 올인 안 한다고 지랄, 엄마가 일한답시고 애 하나 잘 못 본다고 시댁에서 지랄. 내가 왜 양 쪽에서 그 딴 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어제는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 두드리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는 거야. 내가 뭘 위해 여기에 이러고 있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그렇다고 형부 직장 하나 믿고 언니 삶을 통째로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해요. 진짜 하면 안 되는 말이지만 형부가 바람이라도 나봐. 아니면 지금 하는 사업이 망하기라도하면 어쩔 거야 언니. 경제권은 버리지 마세요. 버티세요, 언니."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야. 너도 이제 아이를 낳을 거니까 그때 되면 이해하겠지. 핏덩이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한테 맡겨놓고 일하다 보면 현타가 오는 때가 있다니까."


왕사탕만 한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이고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현타? 하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나도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품은 피 같은 애가 아침마다 자지러지게 울면서 엄마를 찾으면 출근이고 뭐고 주저앉아 울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쌓은 커리어는?




선배는 이름만 대면 알법한 유명한 광고쟁이다. 대학시절, 4.5점 만점에 4.3의 학점, 토익 만점, 여러 번의 공모전 수상 경력의 그녀가 그 유명한 광고회사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열명에 물론 나도 포함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20대 초반, 나는 그녀를 여성학 수업에서 처음 알게 됐다. 선배는, 페미니즘을 한답시고 어울리지도 않은 커트 머리에 담배 냄새까지 덮어쓴 타 선배들과는 종이 다른 사람 같았다. '모성애는 신화다', '가부장제를 타파하라'등 해묵은 페미니즘 논쟁거리에서 늘 그녀는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논리에서 맹점을 찾곤 했다. 심지어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남자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교수를 향해 "교수님은 똑같은 월급을 준다고 하면 가사 도우미하실 건가요?"라고 질문을 해 교수를 민망하게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비현실적이며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여성학 수업에서 홀로 꼿꼿이 '현실주의자'를 표방하며 자리를 지킨 선배를 나는 무척이나 선망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녀는 일명 ‘페미니스트 스테레오 타입’과 전혀 맞지 않았다. 거칠기보다 부드러웠고 저급하기보다 여유로웠다.


종강파티 술자리에서 그녀는 후배가 따라주는 소주잔을 모두 거절했다. 다음 날 남자친구와 근사한 곳에 가기로해서 얼굴이 부으면 안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잠깐 분위기가 어색해지긴 했지만 이내 모두들 수긍했다. 선배의 논리는 ‘자기만족’이라는 페미니즘의 용어와 들어맞았고 ‘행복 추구권’이라는 이념과도 어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줄곧 이런 이미지였다.


그 이후 여성학을 복수 전공하게 되면서 수차례 그녀를 만났고, 그러면서 그녀와 친해졌다. 어떤 여배우가 '엣지'를 운운하면서 유행어가 되기 시작한 훨씬 전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그놈의 '엣지'란 걸 발견했다. 독특하면서도 오버스럽지 않은 화장과 그녀의 패션 감각을 보면서 몇 번을 따라 하기도 해보았지만 실패였다. 그녀의 옷을 빌려 입는다고 그 분위기와 포스까지 그대로 옮겨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나는 선배가 더 큰 무대에서 성공해주길 바랬다. 그녀에게 한국은 매우 작고 좁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를 알아봐 준 회사에 들어갔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최고의 연봉을 받아가며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나에게 내 앞에서 사직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니까 그녀만은 성공해주기를 바랐던 것은 내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나는 하지 않으면서 그녀는 하길 바랬던 게으른 이기심 때문이었을까.


"언니 페미니즘 좋아하잖아요. 페미니즘에서 하는 말 있잖아요. 더 이상 못하겠다고 손을 들어버리면 그래서 이 사회에 안주하게 되면 바뀌는 건 없다고. 누군가가 바꿔주길 기대하지 말고 그 속에 파고 들어가 바꾸자고 한 거그때 종강하던 교수님이 하던 말 기억 안 나요? 언니가 거기서 버텨가면서 바꾸면 안 돼요?"


"나한테 희생을 강요하지 마. 이건 제도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커리어냐 엄마냐를 선택해야 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으면서 개개인들한테 어떤 선택을 하면 안 된다고 비난하는 건 페미니즘에도 도움이 안돼."


"그럼 언닌, 페미니즘을 위해 무엇을 할 거예요?"


"뭘 왜 해야만 하는데? 난 날 위해 살 거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난 날 위해 살 거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래, 그녀는 결혼을 원했고, 아이를 원했다. 결혼, 꼭 해야 할 필요 없고 애, 꼭 낳을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선택한 건 자신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알지만 해보겠다는 그녀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난 그녀에게 나도 하지 못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커리어를 버리는 것이 희생이 아니라 아이를 맡기는 것이 희생이라고 여기는 선배의 개인적 선택은 존중해주는 것이 맞다.


오늘 또,

나의 언니가

멘토가 되어주고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언니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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