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자리 양보해달란 건 아니에요.
아이가 타고 있어요!
초보운전, 나도 내가 무서워요
내가 먼저 '배려를 하겠다' 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양보를 바라는 많은 문구들.
그게 싫어서 막상 임산부 배지를 받고서도
한참 동안을 망설였다.
하지만 며칠 만에
결국 달고 말았다.
무엇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고
생존 본능에 따른 선택이었다랄까.
날이 더해갈수록
정도와 강도가 심해지는 입덧과 울렁거림,
저 멀리 100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침에 무엇을 먹었고, 어떤 향수를 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초예민 후각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지옥철로 유명한 9호선을
40분 이상 타야 하는 직장.
앞 뒤로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들의
체온과 숨 냄새를
의도치 않게 느껴야만 하는 출퇴근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이 배지란 것은
왜 이토록 핑크 핑크하고
쓸데없이 샤방샤방한 것인가.
부끄러웠지만 조금은 뻔뻔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 가상한 용기를 비웃듯
첫날부터
실패했다.
남자든 여자든
핑크 석인 줄 알았든 몰랐든
모두가 스마트폰에 빠져 있어
일부러 고개를 들어 살피지 않는 이상
누가 앞에 서있는지 모르는 사람들.
혹여 발견했다 하더라도
바쁘고 힘든 출퇴근길에
어렵게 앉은자리를
그것도 안락하고 편안한 끝 좌석을
양보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아니까
핑크빛 배지를 달랑달랑 달고서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뭐랄까.
비참하다가도 참 치사하다가도
억울한 심정이었다.
한 번은 너무도 힘들어서
"저 임산부예요.” 할까 하다가
가뜩이나 날카로운 세상
눈째림이나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여
포기하고 입을 꾹 닫고 있었더랬다.
출처를 모르는 온갖 체취들이 코끝을 찌르고
위를 강타하면서 저 끝 오장육부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에 서둘러 뛰어내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길 몇 번.
하루는 내 안에서
모성애인지 생존본능인지 모를 용기가 발동했다.
내 아이라도 지켜야겠다.
그래서
난
노약자석에 앉았다.
거기엔 임산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석 지하철에서도
텅 비어있기도 한 곳이었다.
근데 참...
앉아도 앉은 것 같지 않은
자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눈치 엄청 준다.
젊은것이 왜 앉아있지 하는 의심의 눈빛
저건 노인 공경할 줄도 모르나 하는 비난의 눈빛
그리고
난 서 있는데 넌 왜?
하는 피곤한 직장인들의 눈빛.
그래도 뭐.
내가 죽겠는데.
그래서
앉았다.
앉았는데..
화끈거린다.
그래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런 자세로
태도로
석 달이 흘렀다.
....
어떤 임산부에게처럼
할아버지가 일어나라고 호통을 쳤다던가
또 어떤 임산부처럼
"임신이 유세냐! 나도 다 해봤어"라며 혀 끌끌 차는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도
양보받지 못했고
임산부석에 앉지 못했다.
양보
안 바란다.
누구 말처럼
거긴 '지정석'이 아니라
'배려석'에 불과하니까.
누군가에게 배려를 바라는 것만큼
이기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해왔고
내가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은
나의 선택일 뿐이니까.
배려받길 기대하지 않기로 했으니
배려받지 못함을
섭섭하여하거나
분노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도
난
내 권리만을 찾아
앉았다.
사람들의 비좁은 틈을 헤치고
기어이
비어있는 노약자석에 찾아가
착석.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질끈.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노’ 약’ 자니까.
배려받아야 하는 노인
배려받아야 하는 임산부 사이의
경중을 따지기란 쉽지 않으니까.
인생이란 게 만만치 않다는 걸
또 하나 배우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것도 엄마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p.s)
그렇게 188일이 흘렀다.
딱 두번 양보를 받았고
딱 네번 임산부석에 앉았다.
좀 특이한 기록이라면
앉지 못하고 서서 식은땀을 흘리던
만삭임산부를 위해
임산부석 남자를 신고했다라는 것.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안내방송은 나왔지만
임산부석의 그 남자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