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고(go)인지 스톱(stop)인지 맞추는 감은 당연하고, 상사의 기분, 회사의 분위기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 스킬이다.
팀장에게 '눈치가 없다'는 평가는 최악 중에 최악이다. 이건 '일을 못한다' 수준이 아니라 '될 일도 그르치는', 그래서 '있으나마나'한 존재보다 더 한 '있으면 안 될' 존재라는 뜻이다.
팀장이 '위'의 눈치를 볼 줄 알아야 밑에가 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위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오늘 '윗'분은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이럴 땐 정확하고도 다양한 정보로 안심을 시켜드려야 한다. 그래야 쓸데없는 일이나 감정 소모가 생기지 않는다.
불안한 육식동물에게 약해빠진 초식동물은 화풀이하기 좋은 먹잇감이다.
'팀장의 눈치'가 직원 회사 생명(?)의 필요충분조건인 이유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고!"
예상했던 상사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 그게.. 그러니까. 첨에 회의에서 거시기한 분위기에.."
"아니, 아니. 결정 사항만 말해."
결론이 뭐냐고 물었을 땐 변명이 아닌 단답형이어야 했다.
하지만 난 버릇처럼 '결론에 이르게 된 기승전을 설명'하려고 했다.
예전의 상사가 날 그렇게 길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 순서별로, 들리고 봤던 모든 것을 보고받길 원했다. 보고서는 무조건 1장짜리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그때의 나는, 처음엔 그것이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월급쟁이가 달리 월급쟁이던가. 적응해야 했다. 1달도 안돼 나는 '늘여 쓰는 보고서'의 달인이 됐다.
하지만 지금의 상사는 그때의 그와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1장짜리'맨이었다.
"결론만 말해 결론만!!!!"
"다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나는 손에 쥔 10장짜리 보고서를 재빨리 뒤로 감춘 채 종종걸음으로 달 걸음 쳐 나왔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주변의 색으로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이제 나는 '줄여 쓰는 보고서'의 달인이 돼야 했다.
보고서 가득히 늘어져있는 사건 개요, 주요 내용 등은 삭제하고 맨 뒷 장에 있는 결론을 맨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밑에 참고 사항을 요약정리했다. 12포인트의 휴면 명조체, 장평 160의 1장짜리 보고서가 완성됐다.
"그래, 이거지! 잘 정리했구먼."
상사는 보고서를 보자마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 가능한 것처럼보였다.
독방에 앉아 시시 껄껄 주변에 안부전화나 하면서 떨어진 먹잇감을 노리는 쉔지(하이에나)인 줄 알았던 그는, 사실 가장 높은 벼랑 끝에 서서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관망하고 있는 라이온 킹의 무파사였던 것이었다.
인간의 유형을 감정과 행동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한 윌리엄 몰턴 마스톤(William Moulton Marston)에 따르면,
나의 상사는 Dominance, 주도형이다.
주도형 상사에게 보고는 무조건 '핵심만'이다. 이들은 성격이 불같다. 급하다. 그러니 나는 핵심을 보고하되, 위험요인과 예외적 요인을 살펴 보고하는 눈치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은 과거 상사는 Influence, 사교형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동아리 선후배처럼 지내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팀 외 다른 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부터 회사 내 모든 가십거리를 상사에게 전달했다. '남이 아는 것을 나만 모르는 것', 이것이 예전의 상사가 젤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유형으로는 Steadiness(안정형), Conscientiousness(신중형)이 있다. 지금까지 모신 상사만 수 십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이 네 가지의 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상사는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