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소확행

나를 위한 1시간

by 권도연

따뜻한 카페라떼 한잔과 간단히 요기할 샌드위치. 그리고 멍 때리다가 지칠 때쯤 두드릴 키보드나 둘 곳 없는 눈길을 돌릴 책 한 권.

특히나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복잡한 생각, 복잡한 사람들, 복잡한 말들은 멀리 던져버리고 혼자 카페 구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다 가진, 부자가 된 기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이렇게 혼자만의 점심시간을 갖는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 이 좋은 걸 서른 중반이나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왜 그간 혼자 먹는 점심이 부끄럽고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목소리 크고, 친구 많고, 잘 웃는, 성격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외향적인 사람인척, 활발한 사람인척 근 스무 해를 살아왔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서른 중반을 넘으면서 내가 만들어 온 '내 성격'이라는 것들이 스스로에게 큰 짐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진작에 어루만져졌어야 할 여린 마음과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튀어나와 순간순간 나를 괴롭혀 왔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진짜 나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억지로 웃지 않고 억지로 밝아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들다고, 아프다고 징징대거나 괜한 우울증 환자 흉내를 내며 동정심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는다. 세상은 장점보다 단점을 더 쉽게 기억하고,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굳이 나를 깎아내려봤자 결국 남는 것은 만신창이가 된 나뿐이다.



하고 싶은 말 다 해서는
직장생활 잘하기 힘들어.
똑똑한 척은 집에서나 하는 거야.


결론도 방향도 없는 보고서를 써야 했던 날, 소파에 누워 엄지 발가락을 깔딱거리며 볼멘 소리를 했더니 엄마가 등짝을 툭 치며 말했다.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하는 거보다 '싫은 거 싫다고 표현 안 하는' 게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현명한 거라고. 그 날 이후 나는 싫다, 아니다, 틀렸다 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대신 슬쩍 피해 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오늘처럼 아무하고도 말 섞기 싫은 날,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점심시간, 나 혼자 쏙 빠져나오듯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결국 날카로운 칼로 돌아와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낼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만 최선을 다 해서 하고 딱 거기까지만 하자고 브레이크를 건다. 오지랖을 부려가며 남의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끌려다니느라 나의 소중한 시간을 버릴 이유도 없다.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사회생활 잘하는 tip, 이쁨 받는 tip, 성공하는 tip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헌책방에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에서 멋진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책이었는데, 사랑과 관련 없는 삶에도 큰 깨달음을 주는 말이라고 느꼈다. 그렇지, 방법을 가진 삶은 삶이 아닐 것이다. 미리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이토록 다양하게 살진 않았겠지. 그러니 나는 나의 방법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창 밖으로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앞서 걷는 사람은 부장일 거고, 그 뒤로 차장, 대리, 그리고 막내 사원일 것이다.

그들보다 한 템포 늦게 걷는 날, 이제야 천천히 나를 생각하고 나를 안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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