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체가 너무 조용하네."
"네..이제 못뵙겠네요."
"그러게. 힘들죠? 여러모로."
"괜찮아요. 괜찮아지겠죠. 그간 고생하셨어요, 아주머니. 아, 어머니."
"아유. 안그래도 차장님같은 딸이 있어요. 어디에 있든 건강해요."
어머니라니.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아주머니였지만 괜히 오늘은 어머니로 부르고 싶었다. 주책이다.
당이 잘 나갈때도, 지금처럼 바닥일때도 아주머니는 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말을 건네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엄마 말처럼 난 정말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건물 전체는 아수라장이 된다. 저녁으로 시켜 먹은 치킨 조각들과 컵라면 그릇, 먹다 남은 도시락 반찬들에 미처 파쇄하지 못한 종이들까지 나뒹굴어 흡사 폭탄 맞은 전쟁터 같았다. 그 날은 신발 바닥에 들러붙어 온 오물들까지 합세해 더 엉망이었다. 하지만 늦은 자정까지 보고서에 파묻혀 좀비처럼 일하는 직원들 모두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퇴근했을 터였다.
'저걸 다 누가 치우지.'
다음 날, 모두가 놀랐지만 소리내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게 처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는데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때 엄마를 떠올렸다. 출근하면서 돼지우리를 만들어 놓은 방을 말끔히 원위치 시켜놓는 엄마의 마법을. "돈 좀 벌어온다고 유세지?" 방 청소하느라 한 나절이 걸렸다며 엄마는 아픈 허리를 퉁퉁 두드리며 꾸중했었다. 매일매일 새롭게 더러워졌는데 매일매일 다름없이 깨끗했던 내 방처럼, 생각해보면 이 사무실도 내 자리도 늘 한결같이 깨끗했다.
일 좀 한다고 내가 유세를 부렸구나. 괜스레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사무실 너무 더러웠죠. 고생하셨어요.' 라는 말이 입에서만 돌다가 사라져 버렸다. 퇴근할 때가 다 되어서야 관리실에 전화했더니 이미 퇴근하셨단다. 늘 그랬듯 아주머니는 일에 방해가 될까 까치발로 몰래 들어 와 쓰레기통을 비우고 가신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아주머니는 직원들 눈에 띄지 않고 싶어하신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더랬다. 감사의 인사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출근 길, 뒤를 돌아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이다. 아예 멈춰선 채로 한참을 바라봤다. 그간 지나쳐 온 것들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굉장히 감사한 일이다. 지금의 시간이 없었다면, 매일 오가는 이 길을 되돌아서 뒤를 돌아보는 기회가 없었다면 몰랐을 것들이었다. 그냥 묻힐 뻔한, 지나칠 뻔한 풍경들과 인연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퇴근길에 자두 한 봉지를 샀다. 빨간 자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면서 환하게 웃던 엄마처럼 아주머니도 그렇게 웃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일은 하고 싶었던 인사도 드릴 생각이다.
그간 감사했어요. 어머니.
귀찮아서 무심히 지나쳐놓고 그것이 당신을 배려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이제 다른 건물로 이사가면 또 다른 어머니를 만나겠죠? 이제는 누구에게나 밝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유쾌한 용기를 가져볼 생각이에요. 건강하셔야 해요. 딸.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병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