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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Sep 28. 2022

회사에서 언니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언니가 아니었다.


나는 언론고시란 지난한 시험을 오래도록 준비하다 대학원을 거쳐 해외 봉사활동까지 하다가 결국 서른이 다 되어서야 직장에 들어온 '늙은 신입'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지금의 직장에서 인턴으로 시작했다가 정규직으로 정식 취업이 된 '어린 신입'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입사 연도로는 7년이나 차이나는 선배지만 나이로는 2년 아래 동생이었다.




입사 4년 차에 일하기 어려운 부서로 알려진 팀에 발령을  받았다. 나는 인사 명령지에서 나의 직속 상사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덜컥 겁이 났다. 그때 나에게 그녀는  '까다롭고 깐깐한' 어려운 선배였다. 지금 안 사실이지만 그녀에게 나도 까다롭고 깐깐한 '나이 많은 후배'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방점은 나의 성격이나 인상이 아니라 '나이 많음'에 찍혀 있었다. 그녀도 겁이 났을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고도 서늘한 첫 인사 이후로도 선배는 나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조직 분위기 상 위계질서(?)와 군기잡기(?) 디폴트였다.  선배가 후배에게 반말과 존대를 섞어가며 은근히 찍어 누르는 것은 당연하다고까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다.

선배가 후배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업체 직원을 대하는 느낌과 더 가까웠다.



그 당시 나는 나이 어린 선배들의 이유 없는 각잡기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매우 섭섭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지나친 조심스러움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이 좋았고 깔끔하고 신속한 업무 능력을 배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자 후배에게는 다정히, 남자 후배에게는 거칠게 대하는 그 태도가 자못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무슨 모임, 누구 라인 하면서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다음 날 새벽 해장국을 들이키는 비공식적 조직을 보란듯 비웃는 그녀의 자신감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나는 그녀에게 나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관계 설정에서  세우는 상대에게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쪽에서 먼저 그것을 부실 구실을 만들어 주는 거였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나이 많음을 가볍게 (혹은 가벼워 보이게) 던져버렸다. 툭.


"제가 나이가 많아서 불편하시죠? 저 그냥 어리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나이만 헛먹었지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편히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말이야 '나이 많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라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고. 진짜 너 불편했었다고.


그 이후 그녀는 나에게 '언니'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실제로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 후배들이 친한 남자 선배를 격의 없이 부를 때 쓰는 '형'이란 호칭 수준으로 그녀와 나의 사이가 그렇게 좁혀졌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와 만나면 직장 생활에서의 소소한 정보를 나누고,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대화도 주고받는다. 서로 아는 사람이 겹치고, 직업 특성상 민감한 주제를 꺼내도 익스큐즈가 되는 사이이니 감정을 털어놓기도 쉽고 편하다.





회사는 친구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세요.

사표 쓰면 남입니다.

결국 위로 끌어주는 건 남자입디다. 근데 그들도 남자 후배를 끌어주죠.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다가 직장 상사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가 험담의 대상이 되고 결국 사직서를 쓰게 됐다는 글에 공감 100개가 넘게 찍힌 댓글들이었다.

5번째로 높은 공감 수를 받은 것은 '여자의 적은 결국 여자'라는 댓글이었다.


나는 그래도 예외는 있다며 나의 이야기를 쓰려다 그만두었다. 요즘 커뮤니티에서의 대세는 '성별 갈라 치기'였다.

누구는 남자라서, 누구는 여자라서 싫고 좋고 가 정해졌다.

그런 여론의 파도에서 물살을 거슬러 보드를 타고 즐길 것이 아니라면 입은 닫고 키보드는 안 쓰는 게 나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친한 후배가 생기면 말한다.


회사에서 좋은 언니 하나쯤은 만들어 두라고.

직장을 나가더라도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는,

회사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1시간 이상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동네 언니 같은 존재를.


물론 좋은 오빠나 좋은 형도 있을 것이다.

'것이다' 라고 썼으니 추측이다.

경험이 없는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방구석 키보드워리어나 하는 짓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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