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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Nov 11. 2021

평범한 직장인

겨울바람을 실은 비가 차갑게 내리던 날이었다.


업무에 치여 서로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있던

회사 선배와 돈가스를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팀장 됐으니 점심때 맥주 한 잔은 해도 되지?"


선배는 내가 신입 쪼렙이던 시절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할 때 앞장서 주었던 사람이었고,

회사원이라면 예외 없이.'사표 드릉드릉'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던 '마의 3년 차' 시절, 기자 시험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해주었던, 인생의 멘토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가 오늘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마주 앉아 거품이 가득한 생맥주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며 말하는 거다.


"너 지금 뭐라도 배워두는 게 어때. 나처럼 조직에 헌신하고 사람에 충성 말고. 내가 돌아보니 그래.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해."

"갑자기? 왜요?"

"나 3년 후면 회사에서 나가야 하잖아."

"버, 벌써여?"

"직급 정년제잖아. 나 서른에 입사했다. 그러니 나갈 때가 됐지."


선배는 공인 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시험도 쳤는데 응시자가 많아서인지, 부동산 광풍 때문인지 난이도가 너무나 높아져 몇 문제 풀지도 못하고 고사실을 나왔단다.


"그래도 공부도 곧잘 했고, 나름 밥벌이도 잘했는데. 회사 명함 떼면 남은 게 없는 거야.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거지. 너도 한 10년 남았지? 자격증을 따던 뭘 배우든 혼자 할 수 있는 걸 찾아."

"그거 할 시간이 어딨어요?"


나는 입을 뾰족하게 내밀며

당장 오늘만도 아침에 보고서를 쓰고, 오후에 쓸 보고서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며 신세 한탄했다.


"내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알아? 딱 10년 전 네가 원래 원하던 일은 이게 아니었다며 언론사 면접을 보러 갔다 왔다고 고백했을 때, 난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던 거. 참 좋을 나이다 하고 말았던 거. 그때 뭐라도 깨닫고 회사일 말고 다른 걸 해봤다면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거. 지금 생각하면 나도 굉장히 어렸는데 난 내가 회사에 영영 있을 줄 알았거든. 뭐라도 될 줄 알았지. 국장 나부랭이가 아니라."


선배는 그러고도 맥주 세 잔을 더 마셨고

나도 선배의 고민에 취해 같이 술잔을 들이켰다.



전교 1등, 좋은 대학 입학, 좋은 회사 취직.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은 겨우 '원 오브 뎀'이 되어버린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우울해서

둘은 연거푸, 한숨을 가득 내뱉으며 탄산이 오르는 맥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볼이 발개져 식당을 나서는데

들어설 때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고

하늘은 겨울 구름을 뭉게뭉게 뿜어내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식당 밖을 나서던 선배와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그 순간이 운명처럼 느껴져

서로를 꼭 껴안으며 괜한 희망을 꾸었다. 


"우리 유튜브나 해볼까?"

"주제는요?"

"아무튼 출근 같은 거?"

"얼굴 팔기 싫어요."

"그럼 가면 쓰고?"

"그걸 누가 봐!"

"그렇지?"


....






자리에 앉아  하릴없이 인터넷을 살펴보는데

세상엔 특별한 사람들이 참으로 넘치게 많은 거다.


책을 낸 직장인

유튜브로 유명해진 직장인

강연을 다니는 직장인

등등등


그에 비하면 나는 어떤 쓸모를 지닌 사람인가

갑자기 자기 반성 모드에 돌입하며 하나 하나 적어 나가는데

결론이 참으로 참혹했다.



엑셀 함수 쓰기 - 무쓸모

한글 보고서 쓰기 - 무쓸모

PPT 만들기 - 무쓸모



무색무취. 회색분자에 무채색을 좋아하는 사무직 회사원인 나는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취미도, 자신 있는 분야는 더더욱 없는 그냥 그저 그런 매력없고 노잼인 4천 5백만 명 중의 한 명의 한국인일 뿐이구나!



특별한 줄 알았던 스스로가

다른 누구보다 평범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나이가 들수록 너무도 자주 찾아왔다.


어릴 땐 내가 미운 오리 새끼인 줄 알았다.

못생겼지만 결국 날지 못하는 오리들 사이에서

보란 듯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


하지만 나는 돌아보니 그냥 '오리 새끼'인 거다.

주인공이 아닌 배경

주연이 아닌 조연.



알면서도, 깨달은 지 한참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미련을 떠는 중이다.



나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 거라고.

나는 아주 조금은 특별한 소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라고.


오늘도 자기 최면을 걸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엑셀 함수를 넣고 자간, 자평에 맞춰 보고서를 쓰고

누군가의 유튜브, 유명 연예인의 복귀작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9호선 급행을 탔다가 완행을 바꿔 타며 익숙한 행선지를 알리는 방송에  몸을 일으켜 집으로 향한다.



매일이 똑같은

평범한 하루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슬픈

하루가 오늘도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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