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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Apr 17. 2024

제 10화



결과는 대박이었다.


프리미엄 베이비 크림은 출시한 지 5개월 만에 40만 개가 동이 나더니 육아 프로그램에 등장 한 이후부터는 아시아 전역에서 팔려나갔다.


"모델을 쓰지 말고 ppl로 포지셔닝해보는 건 어떨까요?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프로그램이요. 맘카페에서 홍보 댓글 돌리는 것보다 이게 고급 이미지 구축하기엔 유리할 것 같습니다."


소영의 아이디어는 부서장의 재가하에 바로 현실화되었고 그 결과는 매출로 나타났다. 덕분에 소영은 명실공히 부서장의 라인으로 등극했으며, 바로 다음 해에 팀장으로의 파격승진이 예고되어 있었다.


에서만큼 소영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강이와 동거한 지 1년이 되던 해, 

강이는 1주년 축하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소영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매일 밤 캔맥주를 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주말 아침마다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거리며 브런치를 나누면서,

여름휴가, 겨울 휴가마다 일본으로 태국으로 여행을 가면서 둘은 이미 결혼한 부부보다 더 가깝고 아쉬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꼭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런데 동거인보다는 동반자였으면 좋겠고 부부는 아니더라도 소울 메이트 같은 그런 관계가 되면 좋겠어."


강이의 말에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도 강이와의 지낸 시간마다 문득 자신이 생각한 결혼한 삶은 이런 것이 아닐까를 떠올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은 하지 않으면서

다만, 해서 더 나은 것은 하는 걸로.


강이와 소영이 이 부분에서 늘 의견 일치를 보았으니

앞으로의 시간도 지금처럼 보내면 될 일이었다.



소영과 강은 그날 이후 자신들 개개인의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포함되었다.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던 소영과 강이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소영의 조카 은서 때문이었다. 엄마의 허리 문제로 머물렀던 그날 이후로도 은서는 가끔 소영과 강이의 집에 맡겨졌다.


물론 힘들었다. 피로했고 고단했고 귀찮았지만 그 안에 그간 겪어보지 못할 뿌듯함이 있었다. 주어진 업무를 해내고 시험에 합격하고 목표한 것을 이루는 것과는 다른 벅참이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하고 울고 먹는 동안 소영과 강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어렸을 땐 말이야, 내가 옛날엔 말이야.

소영은 완벽주의인 줄로만 알았던 강이의 다른 면을 보았다.

강이는 겁쟁이인 줄로만 알았던 소영의 다른 면을 보았다.

둘은 세 살짜리 아이를 통해  자신과 상대와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으면 어른이 된다는 선배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지금까지 내 인생은 사실 20살 때의 삶과는 다를 바 없거든. 그런데 아이를 낳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아. 그게 무섭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해."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에 대해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소영과 강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또 다른 행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둘의 '어쩌면'이란 생각은  '분명'이라는 문장으로 바로 갈음되었다.

분명 애 때문에 회사를 쉬거나 동료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겠지.
분명 애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다 엄마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야 할 거야.
분명 주말에 늦잠을 자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여유 따위 없을 거고.
분명 분유값, 기저귀값에 한숨을 쉬고 입는 옷, 먹이는 밥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유모차 카시트 뭐다해서 돈돈돈 거리느라 마음도 얄팍해지겠지.


그러다 '그래도'를 또 떠올렸고


그래도, 정말 그래도

날 닮은 아이를 낳는 건 인간이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보람된 일이 아닐까.


그래, 그래도가 있었지.


소영은 그래도라는 부사에 더 힘을 실어

강이와 부모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 나 강남에 전셋집 구했어. 영어 유치원 셔틀도 오고 수학, 국어, 논술 셔틀도 오는 데라 전셋값이 지금 우리 집 팔아도 못 들어가는 덴데 이번에 못 들어가먼 영영 못 들어갈 거 같아서 그냥 눈 딱 감고 들어가려고. 부동산 중개인 말이 아파트 동 전체가 다 의사, 변호사, 기업 대표들이래. 웃기지? 돈 수억 벌면서 그 작은 30평 대 아파트에 모여 산다는 게.  학원 셔틀 오는 곳이라고 비좁고 낡은 집을 참고 견디는 게."


언니 태영은 은서를 데리러 오는 길에 마침 집에 있는 소영을 보고는 자신의 플랜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지는 이랬다.


- 이제 은서가 3살이니 당장 내후년부터 사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5세에 영어, 6세에 사고력 수학, 7세가 되면 독서, 토론, 논술 학원에 보내야 한다.

- 초등 4학년에는 대입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고력 수학은 교과 수학으로, 미국식 영어는 내신과 수능을 위한 문법·독해 중심의 한국식 영어로, 독서·토론·논술은 독해 중심의 국어로 바꿔야 한다. 초등 5~6학년이면 중등 과정을 마치고 고교 과정을 시작한다. 이 연결 학습을 위해 학원은 필수다.


소영은 벌써 1시간째 엄마를 붙들고 강남에 입성해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는 언니를 보고는 입을 뗐다. 


"그럼 언니 직장은? 형부 병원은? 강남에서 어떻게 출퇴근을  하겠다는 거야?"

"괴롭지만 어쩌겠어. 하나 있는 자식,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줘야지. 너도 애 낳아봐. 그게 그렇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


본가에서 강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영은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앉아 생각했다.

그리고 강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도 아이를 갖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강아, 우리 아이는 낳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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