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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도연 Mar 20. 2024

제 8화

하필이면 토요일이었다.

며칠 째 야근과 특근만 반복하다 오랜만에 맞이한, 일 없이 쉬는 주말이자

요즘 들어 살짝 간질간질해진 강이와 경기도 근처에서 글램핑을 가기로 약속한



"미안. 나 때문에 주말까지 망치네."

"어쩔 수 없지. 태영 누나랑 매형은 안된다는 거잖아."

"어. 언니랑 형부 둘 다 학회랑 세미나라나. 하필 둘 다 출장 중이라. 미국에 있는 사람을 밤 비행기로 당장 오라 할 수는 없잖아."


소영은 미안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짜증으로 대화를 끝냈다.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들로 예민해진 소영은 강이에게 종종 그랬다. 강은 그럴 때마다 아, 또 시작이네 하고는 맞서기보단 한 발 뒷걸음쳤다. 오랜 시간 함께한 관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 생활도 이렇겠지. 강이는 소영과의 결혼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친한 형들이나 주변의 사례를 봐도 굳이 법적인 관계를 엮어 좋을 일은 없어 보였다.

 

은서가 집에 왔다. 22년에 태어난, 2살짜리.

말은 못 하지만 짜증, 분노, 배고픔 등의 모든 감정은 표현하는, 잘 걷지만 뛰다 넘어지고, 뭐든 만지고 무엇이든 잡고 올라가는 나이.

의외로 은서는 낯선 강이에게 잘 안겼다. 강이는 태어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생물이 꼬물거리며 자신과 눈을 맞추고 웃고 침을 흘리는 모습이 매우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야 이거 봐. 내가 눈을 깜박이면 따라 해. 못생긴 표정 하면 정말 좋아한다니까!!"

"은서를 안아서 배에 코를 파묻어 봐. 이게 아기 냄새인가 봐. 평생 코 박고 있고 싶은 냄새야. 뭔가 따뜻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


강이와 은서는 몸을 뒹굴며 한참을 까르르거렸다.

넓었지만 건조하고 단정했지만 허전했던 집이,

몇 분 만에 촉촉하고 요란하고 따스하며 풍성하게 변해갔다.


"강!! 기저귀!! 강!! 휴지 가져와!! 강!! 밥이 너무 뜨겁잖아 애 입 홀라당 다 데겠다!!!"

 

소영은 강이를 열심히 불러댔고 강이는 또 부지런히 소영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러다 은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춤이라도 추면 둘은 까무러치듯 웃었다.




은서는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기였다. 엄마가 싸준 늘 먹는 밥이어도 입에 맞질 않으면 금세 툭하고 뱉어버렸다. 강이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 참을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갑자기 시시해진 건지 드러누워 울기도 했다.


"데리고 나갈까?"

"어딜?"

"쇼핑몰. 유모차 갖고 돌아다니면 은서도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주차는 어쩌고. 주차하려면 대기만 1시간이라며."

"차를 왜 가져가. 우리 둘 다닐 때처럼 버스 타고 가면 되지."

"유모차를 타고 버스를?"

"지하철이 나을까?"

"자전거 끌고 전철 많이 타잖아. 휠체어 타는 사람도 많고. 괜찮지 않을까."







집에서 4호선 사당역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4호선을 타고 이수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 쇼핑몰이 있는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걸어가는 것, 4호선을 타는 것까지는 수월했다. 소영과 강은 유모차를 끌며 머리카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행복해했다. 애기 엄마 아빠가 되면 이런 느낌일 거 같다고. 유모차를 끌고 걸으니 왠지 차들도 주변에서 천천히 가는 거 같고 사람들 표정도 친절해진 거 같다며.


좋았다. 처음 느껴보는 든든함과 행복감이 몰려왔다.


지하철을 타면 다르지 않을까. 조용한 데 은서가 울음을 터뜨리면 어떡하지. 누가 이렇게 복잡한 지하철에 유모차를  끌고 오냐고 발로 차거나 시비를 걸면 어떡하지.


그러나 은서는 울기는커녕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한지 주위를 두리번대며 옹알이를 하기 바빴고 

주변 사람들은 한 번씩 은서에게 눈길을 주며 반가워했다. 아이를 낳은 부모가 돼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해볼 만하겠어. 소영은 강 이를 보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강이도 소영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다.


지하철에 내려 7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4호선은 지하 2층, 7호선은 역 반대편 지하 4층에 있었다. 소영과 강이는 앞뒤로 스쳐가는 인파들을 헤치고 유모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동선을 찾았다.

환승 안내 화살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14번 출구로 나가서 10번 출구로 들어오라'라고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14번 출구를 찾아 승강장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니 개찰구가 있다. 카드를 찍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10번 출구가 안 보인다.


"화살표가 위로 가라는 거 같은데?"


보니 또 에스컬레이터다. 근처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올라갔다. 문이 열린다. 보니.. 밖이다.


"뭐야, 왜 밖이야??? 우리 7호선 타야 하잖아!"

"어.. 잠깐 있어봐. 사람들 다 저리로 가는데? 따라가자."


강이 말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강이와 소영은 그들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바닥에 유모차 바퀴가 자꾸 걸렸다. 유모차가 덜컹거리자 은서가 조금씩 칭얼대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마스크도 쓰지 않은 은서는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달려! 달려!"


강이가 유모차를 미는 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소영도 따라 달렸다.

그때였다. 유모차 주머니에 구겨 넣은 기저귀와 우유병, 물티슈 등이 우르르 떨어졌다. 은서는 울음이 터졌다.


"얼마나 더 남은 거야?"

"구글에는... 400미터라고 나와 있..."

"아이씨."


아이와 물건을 수습한 뒤에야 7호선 팻말이 보였다.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는 속도가 느렸다. 한 참을 기다려서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제일 아래층으로 보이는 B1층을 눌러 내리니 또 카드 찍는 곳이 나온다.


"어? 지하철 타는 데가 여기 아니야?"

"한 층 더 내려가야 해."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말에 소영과 강이는 주저앉고 싶었다. 또 찾아야 했다. 그놈의 엘리베이터를.

눈앞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저거 에스컬레이터 타면 바로인데. 그냥 유모차 들고 탈까? 엘베까지 언제 또 걸어가."

"그래. 내가 은서 안고 가방 하나 들 테니 넌 유모차랑 가방 하나 들어."


둘은 짐을 나누었다. 조금 더 가벼운 것이 소영에게 갔고, 조금 더 무거운 것이 강이에게 갔다.


소영은 그때서야 자신이 뻐근한 허리 때문에 토요일 아침 정형외과 도수 치료를 예약해 놨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버둥 치는 은서의 몸짓에 허리는 더 아파오고 있다는 사실도.







주말의 쇼핑몰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와. 서울에 있는 사람들 여기에 다 모여있는 거 같은데?!"

"오늘 뭐 행사 있나 봐. 아.. 무슨 팝업이라는데."

"요즘 모든 잘 나가는 신제품은 전부 다 백화점 아니면 성수에서 팝업 연다며. 오늘은 또 뭐냐."

"오늘 팝업은.. 아! 그 결혼 미친 뭐 웹툰 굿즈 행사다."

"워!!!!!!!!!! 결혼 미친 짓이다!!!! 팝업???????? 나 간다. 나 말리지 마."


소영의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소영과 강이와 은서는 1층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와도 탈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유모차를 실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유모차를 접어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하나 싶었지만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10분을 넘게 끙끙대며 유모차를 접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두뇌가 흔들리지 않고 엄마의 허리를 굽지 않게 해 준다는 고급 디럭스 유모차는 대한민국, 그것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있는 서울 한복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유모차 들고 애도 들고 에스컬레이터 타자!"


소영은 은서를 안아 들었다. 강이는 한쪽 어깨에 기저귀 가방을 걸고 두 팔로 유모차를 번쩍 들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찰나였다.


"거기!!! 거기 스톱 스톱!!!!!!"


경비가 따라붙었다. 소영과 강이는 마치 물건을 훔치고 도망가는 도둑 마냥 경비를 무시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탔다. 이번에 놓치면 팝업 스토어는 영영 바이바이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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