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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도연 Mar 20. 2024

제 7화

"그러니까 언제 이사를 한다고?"

"토요일, 기본적인 건 네 다 있대옷이랑 노트북 정도만 챙겨 가려고."

"엄만 뭐라셔? 신기하다. 세상 보수적인 너의 엄마가 동거를 허락하다니."

"엄밀히 말하면 독립을 허락한 거지. 동거를 허락한 건 아냐."

"친구네 집에 들어간다는 건 아신다며."

"그 친구가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모르실걸."

"결혼이나 동거나. 결혼하라고 잔소리하신다며."

"결혼이랑 동거랑 같냐."

"뭐가 다른데. 혼인 신고 여부? 그거 안 하고 사는 부부도 많아. 집 살 때 신혼부부보다 청년이 저금리라 그래서 신고 안 하는 걸로 아는데."

"사람들 참 현명해. 그걸 다 따져보고 살다니."

"동거도 현명한 거지. 요즘 두 커플 중에 한 커플은 이혼하는 세상인데,  살아보고 결혼 결정하는 거만큼 똑똑한 게 어딨어. 혹시 너네 엄마 네가 딸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동거한 건 왠지 흠이 난 거 같고 한 번 갔다 온 거 같고 뭐 그런?"


예진은 어느 날 우연히 참여했던 독서 토론 모임에서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언니를 만난 이후로 변하기 시작했다. 짧게 쇼트커트를 한 이후로 남녀 문제만 나오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예진의 말을 소영은 듣기만 했다. 어쩐지 예진의 말은 맞는 것 같다가도 자신의 입으로 꺼내긴 어려웠다.

자꾸 그렇게 적을 만들면 자기만 손해야. 나 대신 싸워준다고 누가 고마워나 한다니? 다 지 무덤 지가 파는 거지. 인생은 영민하게 굴어야지 대뜸 소리부터 지르고 따져묻는다고 잘잘못 구별되고 해결될 거였음 이 세상에 전쟁도 없겠다.

예진의 말을 전할 때마다 하던 엄마의 말이 소영은 더 공감이 가던 차였다.


"너 같은 무임승차자 때문에 세상은 안 변하는 거야. 목소리를 내야지. 이건 합리하다 이건 잘못된 거다. 이건 편견이다. 그래야 균열이라도 생기는 거지. 난 격변하는 거 바라 않아. 누군가라도 내 말에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어쩌면 지금 이게 잘 못된 거 일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거 그거면 돼 난."







소영이 본가의 짐을 빼기로 한 날이 되었다.


"나가게 해서 좀 엄마 맘이 그렇네. 잠이라도 편히 자라고 허락한 거야. 같이 산다는 그 친구는 코를 골거나 하진 않니? 너는 잠귀가 밝아서 직은 소리에도 깨니까."


'프리미엄 베이비 크림' 론칭 행사를 앞두고 늦은 퇴근과 이른 출근을 반복하는 소영이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하는 건 은서의 이앓이 때문이었다. 조카 은서는 밤마다 몇 번이고 깨서 엄마를 찾아댔고, 할머니의 등에 기대 자다가도 또다시 깨 크게 울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어 플러그로도 이어폰 노래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어느 날 아침 소영은 출근길에 코피를 쏟았다. 그걸 보다 못한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어차피 친구랑은 방 따로 ."

"집이 좀 사나 보네. 방이 몇 개나 되는 집을 자식한테 물려준 걸 보니."


엄마의 미안해하는 얼굴에 소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집 물려주는 부모가 몇이나 된다고. 다들 엄빠 옆에서 결혼 전까지 얹혀살지."

"그것도 참 문제다. 대학 갓 졸업한 애들이 무슨 돈으로 억대씩 하는 집을 사겠어. 그러니까 얼른 결혼해야지. 둘이 모으면 더 쉽게.."

"아이고. 모르는 소리 하시네. 둘이 모아도 못 사요. 요즘 개천에서 난 용보다 한강 남쪽 사고뭉치 금수저가 왜 인기가 많겠어. 서울에 집 한 채, 개천에서 난 용은 월급 평생 모아도 못 사지만 부모한테 수저 물려받은 사고뭉치는 태어난 순간 물려받으니까. 그냥 나 간다."


출처 : https://naver.me/GNvCn8Um



 




최강의 집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좋았다.

강이는 소영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방 하나를 깨끗하게 비워 두었다. 거실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화장실이 딸린 가장 큰 방이었다.


"여기 원래 무슨 방이었어?"

"원래? 여친 방. 그리고 내 미래의 와이프 방."

"와이프 방이 왜 따로 있어? 부부는 같이 써야 하는 거 아냐?"

"얘가 또 영감 같은 소리 하네. 잠버릇 다르고 취미 생활 다른 30년 넘게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남녀가 어떻게 갑자기 한 공간에 섞어 살아. 적당히 개인 공간 확보하고 살아야지."

"오.. 왠지 멋지다 너."

"왜 우리나라 이혼율이 높고 출산율은 낮은 줄 알아?"

"그거야 뭐 다 하는 얘기."

"집이 좁아서야. 각자의 공간이 없으니까 애가 하나만 있어도 좁고 부부가 개인 서재 개인 취미방이 없으니까 꼴 보기 싫어도 계속 봐야 하고 그런 거지."

"어.. 그 말은 왠지 그럴듯하다."

"그러니까 잘 살아보자 우리도.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오케?"


소영과 최강은 5살 기린 유치원 기린반에서 짝꿍이 된 이후로 계속 붙어 다녔다. 강이에게 소영은 거친 남자 애들보다는 부드럽고 씩씩한 친구였고, 소영에게 강이는 감정이 들쑥날쑥한 여자 애들보다 평화로웠고 따뜻했다. 교복을 입고 여드름이 나는 사춘기 시절에는 이유도 없이 서로 거리를 두었다가 대학 합격자 발표하는 날, 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레 연락이 닿았다. 우연히도 신촌의 옆 학교, 둘은 미팅의 주선자로 친구들을 소개해주면서 술을 마셨고 클럽을 갔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애인이 있을 때는 연애 상담, 짝사랑을 할 때는 사랑 상담을 하는 사이. 각자의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는 그 자리를 충실히 메워주는 사이. 애인과 보던 영화를 같이 봤고, 애인과 같이 먹던 치킨과 맥주를 같이 먹고, 애인과 나누던 회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영과 강이는 '남사친', '여사친'이라는 호명으로 선을 그으며 아슬아슬하게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소영과 강이가 서른여덟이 되던 해, 하필이면 둘 사이를 의심할 애인이 둘에게 없었고, 언젠가는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일치를 이루었다.

남들처럼 하지 않고서도 남들처럼 행복하는 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성인인 남녀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방식으로, 자유롭고 여유로우며 자연스러웠다.


난생처음의 독립이라 소영은 걱정이 많았다. 요리도, 청소도, 집안일도 제대로 한 적 없는 내가 어떻게?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국, 찌개, 반찬뿐 아니라 잡채 같은 어려운 음식도 밀키트가 나오는 세상이었다. 마트가 문을 닫아도 편의점이 있었고, 밖에 나가기 싫은 날엔 모든 것이 배달이 됐다. 세탁하기 어려운 정장이나 블라우스는 정기적으로 수거해 가는 구독 세탁소에,  집 앞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만 가면 영화관, 식당, 옷가게가 모여있는 멀티쇼핑몰이 있었다.


소영은 여유로운 지금이 좋았다. 이렇게라면 직장에서의 성공은 물론이고 편안한 삶까지 워라밸이 완벽할 거 같았다. 일하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 일하고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쉴 수 있는, 심심하거나 외로울 때는 남사친 강이와 수다.


"나 이번에 비혼격려금 회사에 신청할까 봐."

"어떻게 하는 건데? 나 결혼 안 해요 하고 신청을 하는 거야?"

"응. 사내 게시판에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면 결혼 지원금 주는 돈 똑같이 주고 휴가도 5일 똑같이 줘."

"그러다 결혼하면? 사람 일이란 모르잖아."

"모르긴 내가 미쳤다고 하니 결혼을? 요즘 내가 코노(코인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뭔 줄 알아? 결혼은 미친 짓이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소영의 전화기가 울렸다.

허리를 다쳤다며 은서를 이틀만 봐달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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