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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Mar 27. 2024

제 9화


결국 팝업 스토어는 보지 못했다.


백화점 1층부터 행사장이 있는 10층까지 15킬로가 넘는 유모차를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 그래 괜찮았다.

한정된 시간 안에 줄을 서야만 받을 수 있는 굿즈를 위해 그깟 15킬로, 어깨에 짊어지고 뛰는 것, 그것 또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앞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 틈에서 울음이 터진 은서를 달래기는 것은,  괜찮지 않다 못해 못 견딜 일이었다.

차라리 야근을 하라면 하고, 박 부장 등을 긁으라면 긁었지, 이건 못하겠어라고 소영은 중얼댔다.  


누가 보면 조카를 보다 그만 짜증이 나버린 성질 나쁜 이모 얘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영이 화가 난 대상은 은서가 아니었다.

좁은 공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숨 막히게 조여 오는 사람들의 시선. 짜증과 경멸, 그 속에 우려가 있었다면 아주 미묘했을,  혐오감이었다면 가장 큰 감정이 소영과 강이, 은서를 향해 쏟아졌다.  감정 쓰레기통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소영과 강은 생각했다.


소영과 강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조여올 듯 답답해지는 것을 결국 참지 못하고 백화점을 뛰쳐나왔다. 소영은 억울했다. 그래서 예진을 만나자마자 불만을 토해냈다.


"아니, 애 엄마는 웹툰 좋아하면 안 돼? 그렇게들 노려보는 거야? 왜 이런 곳에 애를 데려오냐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런 데가 어떤 덴데? 애는, 애엄마는 키즈 카페나 가란 소리야?"


씩씩거리는 소영에게 예진은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했다.


"노키즈존만 찾던 소영이가 변해도 단단히 변했네. 아주 조카 바라기 다 되셨어.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역시 핏줄은 무서운가 봐."


예진의 말에 소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척하면 척. 티키타카가 잘되는 예진이지만 지금 예진의 반응은 서운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 눈빛,  수군거림이 무척 무례하게 느껴졌어. 지들은 그렇게 시끄럽게 수다 떨면서 말 잘 못하는   울음 소리가 시끄럽다고 짜증이야?"


"무례하긴. 한국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애를 별로 안 좋아해. 슬픈 현실이지. 우리나라가 너무 빨리 성장하고 뭐든 경쟁을 해야 하니까 배려해줘야 하고 시간을 줘야 하는 약자를 기본적으로 귀찮아하는 심성을 갖게 된 거라고 봐.  사실 동물도 새끼들은 남의 새끼라도 보호본능을 느낀다는데 한국 사람들은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거부하는 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건조해서 깜짝 놀랐어. 은서 데리고 지하철 탔거든? 은서가 앞에 앉은 사람한테 계속 방긋방긋 웃었어.  근데 아무도 웃어주지 않더라. 한번 쓱 보고 폰 보거나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리더라니까."


"그게 다 살기 팍팍해서 그래. 여유도 없고. 너도 당장 월요일부터 또 야근 아니냐? 중요한 행사 있다며."





그래 행사. 행사가 있지.

제조업 회사 마케팅 기획팀이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

FGI.


소영은 벌써 몇 주째 프리미엄 베이비 크림 론칭을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기 전 바로 전 단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FGI(Focus Group Interview)가 오늘 밤에 있었다.

 FGI는 10명 내외의 특정 조건을 설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품에 대한 디테일한 리뷰를 듣는 것이다. 베이비 크림에 대한 인터뷰를 위해 아이를 동행한 아이 엄마와 아빠 15명이  소영 회사로 오기로 되어있었다.


"나 없어도 되지? 그 시간에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박 부장이 행사 준비 마무리 중인 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차라리 넌 없는 게 도와주는 거지.


"네. 어차피 진행은 리서치 업체에서 할 거고. 전 사람들 반응 같은 거나 스크린 할 거라서요."

"그니까. 난 필요 없겠네. 내가 애를 키워본 것도 아니고 애엄마들 반응을 어떻게 알겠어?"


니까 네가 이혼을 당한 거고요. 애 둘 있는 유부남이 애를 안 키워봤다는 말을 자랑이라고 하니 증말.


"애 아빠들도 옵니다. 성별 무관으로 모집했는데 절반이상 아빠들이었어요."

"참 세상 좋다. 저녁 7시면 한창 저녁 먹고 일하거나 술자리서 꿀 정보 빨 시간에 참 요즘 남자들 느긋해 응?"

"저녁 7시면 퇴근한 후고, 직장 어린이집에서 픽업해서 바로 오기엔 아빠들이 딱인데요?"


소영의 말에 박 부장은 입을 떡하니 벌리며 옆에 선 민차장의 허리를 쿡 찔렀다.


"쟤 왜 저렇게 까칠해?"

"맞는 말이죠. 요즘 세상에 아빠들 육아에 더 열성이에요."

"이러니 여자들이 회사에서 날고뛰지. 에혀 난 이사님하고 술 약속이나 잡아야겠다."

"어? 이사님 아까 나가시던데. 오늘 딸아이 학원에 도시락 갖다 준다고 요 앞에 샐러드집 줄 선다고 급히 가셨어요."

"어어~~~?! 그래에? 아이고 별 꼴이네. 그럼 난 상무님이랑 삼겹살이나 먹어야겠다."


콧노래를 부르는 박 부장 뒤통수에 대고 소영은 속으로 외쳤다. 이놈아 그 상무님도 이따 애 데리고 행사 오신다!







FGI가 예정된 제1회의실 문이 열렸다.
하나 둘,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아기들의 말소리 웃음소리가 건조했던 회의실 안에 가득 찼다. 소영도,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들 모두 자신들 모르게 입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이란, 그런 존재였다.


엄마 아빠들은 대부분 아기띠를 하고 왔고, 걸어올 수 있는 3~4살 아기들은 대부분 손을 잡고 걸어 들어왔다.


"역시 유모차는 힘들죠?"

"아유 말 마요.  서울에서 그것도 퇴근 시간에 유모차 끌고 나오면 테러당할 걸요."


뒤뚱거리는 아이가 넘어질라 조심스럽게 보폭을 맞춰 걷던 아기 엄마가 소영의 말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 저 멀리서 낯익은 남자와 어린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기다렸던,  오늘의 주인공들이었다. 소영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번쩍 들었다.



"형부!!!!"






엄마의 허리는 생각보다 오래도록 낫질 않았다. 병원에서는 엄마가 고령인 점, 아이의 기저귀를 가는 등의  반복적인 행위가 느슨해진 노약자의 근육을 다치게 한 것이라며 당분간은 육아를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냈다.


소영과 언니, 엄마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언니 태영은 중요한 시기에 육아휴직은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소영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만 싶었다. 니 자식인데 네가 안 키우면 누가 키워!!


그때 은서의 아빠, 형부가 끼어들었다.  


"다들 뭘 걱정하세요. 제가 하면 되죠."


그러자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그런다.


"아니 권서방 그게 뭔 소린가, 병원일하면서 일을 어찌.."

"병원 바로 옆에 어린이집 있어요. 좀 알아봤는데 은서가 좀 어리긴 하지만 은서만한 애들이 가끔 오기도 한대요. 거기 원장 선생님을 제가 압니다. 아이들 아플 때 병원에 급히 오면 진료도 몇 번 고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그래도 자네가 어찌. 차라리 태영이 회사 좀 쉬라고 설득을 하는 게."

"에이 안 돼요. 지금 한창 중요한 시기인데, 이번에 놓치면 태영이 커리어에 문제 생겨요. 제가 태영이랑 왜 결혼했는데요. 쟤는 일 할 때가 멋있어요."

"그건 그렇지.."


뭐야 저 남자. 로맨틱 가이였네. 언니 니 결혼 잘했다.


"대신 장모님, 등원 준비만 좀 해주세요. 다음 주에는 은서 봐줄 아줌마를 구해보겠습니다."

"아우. 그렇게 애 때문에 신경 쓰면 일에 방해가 될 텐데."

"예?? 방해라뇨. 제 딸인데요. 제가 키워야죠. 지금도 장모님께 얼마나 죄송한데요. 얼른 데려가겠습니다. 조금만 더 맡아주세요."


그래, 형부가 있었다. 은서는 언니의 딸이기도 하지만 형부의 딸이기도 하다. 왜 그걸 엄마도, 나도 잊고 있었을까.


형부는 그렇게 아이 아빠의 당연한 '권리'를 자처했다.

그리고 오늘, 은서를 안고 나타난 것이다.


"은서야!!"

"우와 은서야 이모 봐. 화장도 하고 멋지게 정장도 입었다!"

"아휴 부끄럽게 왜 그래요 형부."

"아니야. 만날 집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진짜 멋있어. 역시 장모님이 자매 둘을 아주 잘 키우셨다니까. 우리 은서도 이모나 엄마만큼 잘 커야 할 텐데."

"아유 됐어요.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이유식부터 간식, 어른들 먹을 것도 준비해 뒀어요."

"와. 이걸 다 준비했다고? 여기서 은서랑 나 먹을 거 다 해결해야겠다. 은서 이모 최고!!!'



FGI가 시작됐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신제품 테스트가 시작됐다.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의 팔에, 자신의 팔에 바르며 제형과 향과 발림 등을 테스트했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지겹고 답답하다고 짜증 내고 칭얼댔다, 당연히.

아이들은 돌아다녔고, 테이블을 잡아당겼고, 주스를 엎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다.

모두가 모두를 도왔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말 못 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엄마아빠들이 머리를 맞댔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때문에 어린 엄마가 당황하자 육아에 능숙해 보이는 뒷자리 아빠가 나서 아이를 어른다. 그러자 아이는 금세 안정을 찾았다.

 


"참 보기 좋죠?"


진행자가 소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행자는 이번 행사를 책임지는 리서치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아이가 있으면 세상에 대해 참 너그러워지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소리를 하나 봐요."

"진행자님은 아이 있으세요?"

"아뇨. 전 딩크족이에요. 근데 저희 회사는 일부러 경단녀만 뽑아요. 그래서 잘 알아요. 이런 풍경이 매우 익숙하고요."

"경단녀만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이를 키우려면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지잖아요? 누군가의 도움도 꼭 필요하고요. 그래서인지 직원들이 참 선해요. 마음대로 안 되는 아이를 키워서 그런지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도 있고, 직원들끼리 서로 격려하면서 일도 열심히 하구요. 그래서 나도 최근에 아주 큰 결심을 했어요. 우리 직원들처럼 엄마가 되어보려구요."

"어머!"

 "저분들 보고 있으면 왠지 용기가 생긴 다랄까 믿음이 생긴다랄까. 언젠가 심리학 교수가 저출산 문제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는 말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도 될 것 같다는 신뢰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거래요. 맞는 거 같아요. 저, 딩크족이 된 이유가 그거였거든요. 사회에 대한 불신. 내 아이가 이 땅에서 불행해 질 거라는 불안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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