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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Aug 21. 2018

불황의 급행 열차

  


출근길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지만 만석이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더위가 시작된 이후, 지하철은 더한 답답함으로 숨을 토해내게 했다. 쉼 없이 타고 내리는 사람들 사이 사이, 수 십의 노인들이 뿜어내는 황망한 기운들이 자욱히 내려앉았다.


노인들은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발견하면 민망한 듯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 한 명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옆에 앉은 남자의 핸드폰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남자는 몇 번이고 불쾌한 듯 노인을 쳐다보다가 결국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심심하고 따분했던 노인에게 그것은 그저 호기심이었을 테지만 남자는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가 침해당했다는 불쾌감에 지하철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공짜로 탔으면 조용히 쳐 가시던가요.



노인의 얼굴은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리를 내던 남자의 얼굴은 흥분감에 벌개졌다.


평소 같았으면 노인의 역성을 드는 노인이나 예의 운운하며 잔소리를 퍼붇는 어른이 등장했겠지만 조용했다. 모두가 못본 척 고개를 돌렸다.


삽시간에 서늘해져 버린 지하철 안, 들릴 듯 말듯 한

비웃음이 나타났다 흩어지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다.


노인들의 폭염 속 피서지가 되어버린 지하철(출처: 헤럴드 경제)



여튼 틀딱들이란.


옆에 앉아있던 남학생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있던 것을 잊어서인지 학생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그 바람에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귀에 ‘틀딱’이 주는 단어의 무례함이 선명하게 꽂히고 말았다. 학생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폰에 꽂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곳에는 공시생을 위한 한국사 인터넷 강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생은 노량진 역에서

남자는 여의도에 내렸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또 다른 노인이 앉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20년 후를 상상했다.


여의도에 내린 남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자산과 가장 많은 부채를 동시에 지닌 부동산 불패의 신화, 베이비붐 세대였다. 그는 평생을 걸쳐 모아 투자한 부동산이 폭락하자 한순간에 빈털털이가 되었다.


노량진에 내린 90년생의 학생은 청춘을 다 바쳐 공무원이 되었지만 모아 둔 돈이 없어 결혼도 포기한 삼포세대였다. 그는 정부의 급작스런 제도 변경으로 연금 없는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었다.

 


모두가 지하철의 노인이 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다.


어느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지만 불행 또한 남의 일인 것처럼 애써 외면 중이다.


가장 위험한 위기는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급행 열차에 올라탔다. 노인과 남자와 학생의 불행은 이미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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