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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Nov 05. 2018

빨강머리 앤 그리고 다이애나

내가 너를 비추고
네가 나를 비추니
사람의 숲이 이렇게 아득하다
부딪치고 깨어진 조각들이 이렇게 아프다
-황경신 <밤 열한 시>-



다이애나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구나. 눈에 띄거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형벌이이자 고통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튀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 매일매일의 목표였다.


그러다 문득. 가슴이 뻥 뚤린 듯 공허해졌다.

어렸을 때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연극같은 삶에서 자신만은 늘 주인공일거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모든 이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 후에는 절망감이 찾아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사라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과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 중 그저 한 사람이라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싫었다. 특별한 존재이고 싶으나 특이한 사람은 되기 싫은, 무리에 서는 것을 거부해놓고 무리에 속하지 않음을 괴로워하는, 다이애나에게 이 두 가지가 늘 아이러니였다.



참을 수가 없었어.



단짝 친구 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앤은 오늘 학교에서 자신을 홍당무라고 부른 길버트의 머리를 석고판으로 내리쳤다. 그런 앤을 다이애나는 말리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지켜봤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숨죽여 친구의 과격한 장면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텐데. 하지만 메시지는.



잘 했어 앤. 길버트가 잘못했어. 그렇게 화내는 건 당연한거야. 나라도 그랬을텐데.


그러나 다이애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


** 다이애나는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느라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한다. 앤처럼 거칠게 화를 내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에도 죄책감을 갖고 숨긴다.


다이애나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앤이 부러웠을까? 아니었다. 앤이 시험에서 월등한 성적을 거두었을 때,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때도 다이애나에게  질투라는 감정이 일었다. 괴로웠다. 그럴때마다 다이애나는 앤의 불행한 과거를 떠올렸다. 친한 친구가 되기로 맹세한 후 앤이 털어놓은 비밀이 다이애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고아로 자란 앤에 대한 동정심은 가끔, 아니 자주 다이애나를 안심시켰다. 자신의 얄팍한 자존심이 그리고 비열한 열등감이 수치스러웠다.






앤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깨가 봉긋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엄마, 콧수염을 기른 지상한 아빠, 그리고 앞으로 그려진 자신의 미래와 사랑, 결혼, 행복, 성공 등 환상의 세상은 앤이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자 도피처였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시간을 길버트가 방해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큰 콤플렉스인 머리카락 색을 지적하면서, 가장 혐호하는 홍당무란 말을 써가며.


나 잘 한거 맞지?


앤은 다이애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확인받고 싶었다. 사실 잘못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앤이 확인받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다이애나가 아니어도 아무에게라도 자신의 머리가 홍당무 색이 아니라고 했으면 했다. 보기 싫거나 흉한 색이 아니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탁하거나 질문으로 확답받고 싶지는 않았다. 앤은 그 누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오늘처럼 화를 냈을 것이었다.**


**뇌에서 해마는 기억을 관장한다. 해마 옆에는 감정중추인 편도핵이 붙어있다. 즉 기억은 늘 감정과 같이 한다는 뜻이다. 앤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다. 아물지 않은 이 상처는 늘 슬픔이란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앤은, 머리카락 색을 지적한 길버트에게 과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스무살이 되면 윤기나는 흑발로 변할거야, 그치? 캐시모리스?


캐시 모리스는 깨진 유리창에 비친 얼굴에 붙인 앤의 상상 속 친구였다. 외로울 때마다 화가 날 때마다 앤은 캐시에게 다이애나에게도 털어 놓지 못한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앤은 꿈을 꾸고 상상을 할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현실의 삶은 너무도 외롭고 불안했다.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 속을, 감정을 지배했다. 앤의 내면에는 부모로부터의 애착을 박탈당한 세 살짜리의 아이가 있었다. 오늘 길버트를 향해 강한 분노를 표출한 것도 그 아이였다.





앤과 다이애나가 카모티에서 만나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두 소녀의 페이보릿인 코코아가 기분 좋은 향을 풍기며 놓여 있었다. 둘은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다이애나, 나도 너처럼 흑발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정말 행복했을거야. 마틸다도 메튜도 날 더 사랑했을걸. 나의 모든 불행은 흑발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작되었어. 엄마가 없는 것도 친구가 없는 것도 다 내 외모때문이야. 다이애나, 너도 나랑 같이 있으면 부끄럽지? 사람들이 수근대는 거 같아. 왜 저렇게 예쁜 애가 못생긴 애랑 다니냐고.



앤, 난 너의 머리카락이 가끔은 부러워.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반짝반짝이고, 덜 마른 머리카락이 샴푸 향기를 풍기면 붉은 꽃다발을 곁에 둔 착각을 주기도 하더라. 붉은 머리카락은 널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왕관같은 거야. 사람들은  특별함을 기억하고 궁금해 하지. 저기 저 여자들 좀 봐. 다들 너의머리카락을 부러워 하고 있어. 나의 평범한 검은 머리따윈 관심도 없어.




앤과 다이애나는.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서로가 다른 방식으로 외로웠다. 사랑을 잃을까봐, 사람이 떠날까봐,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 압도당할까봐 매일 매일이 불안했다.


둘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았고

다른 몇몇 사람들과 똑같았으며

다른 누구와도 똑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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