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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Jun 07. 2019

다 지나가는 거죠?

견뎌내는 시간들

아이는 운다. 아이는 나를 찾는다. 찾아 매달려서도 품을 파고든다.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생명체를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버겁고 힘들고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달콤했던 주말은 극한의 이틀이 되었고, 신랑과의 다툼도 칼로 물 베기처럼 쉬워졌다. 맡은 업무의 특성상 아이를 안고 노트북에 앉아야 할 때는 정말이지 1분 1초가 곤욕스러웠다. 그러다 기어이. 사달이 났다. 품에서 발버둥 치던 아이의 발이 하필이면,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쳤고, 그 바람에 하필이면, 그 안에 들어있던 90도의 뜨거운 유자차가 그것도 하필이면, 키보드에 쏟아지고 만 것이다.


망연자실. 이 단어가 이토록 간절하게 떠오를 때가 있었던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말 못 하는 8개월 아이를 잡고 혼을 낼 수도 없는 일. 결국 화살은 스스로에게 향했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아서,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 상황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도 너무도 서럽게. 엉. 엉. 엉.


자기에게 밥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던 세상의 신과 같던 어미가 울음을 터뜨리니 아이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이는. 정말 TV 속에 나오는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나보다 더 크게. 나보다 더 서럽게. 소 같은 눈망울 가득히 두려움을 가득 담고서. 아이는 엉. 엉. 엉 울었다. 겁이 덜컥 났다. 저 아이가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울어야 하는 걸까. 유자차를 쏟았다고? 키보드를 망가뜨렸다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생각하니 진정이 되더라. 아이의 울음도 잦아들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가. 일인가 아이인가. 키보드인가 아이인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러려고 공부했고, 이러려고 돈을 벌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만큼 버티고 견뎌내야 하는 건가.









예전 같지 않았다.

꼼꼼함, 깔끔함.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수가 잦았고, 헤매는 일이 많아졌다. 판단력은 흐려졌고, 체력도 떨어졌다. 늘어난 것이라고는 새치머리뿐이었다. 몇 달째 손질받지 못한 머리는 임신하느라 빠진 머리가 우후죽순 자라난 덕분에 '잔디인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하얀 머리가. 하얀 잔디가 정수리에, 귀밑머리에 포진해가고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해야 괜찮아질 것 같았다. 살이 빠졌다는 소리도 자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예쁘게 빠졌으면 신이라도 났지, 힘없이 어깨가 축 쳐진, 개업 날 이후 사람들 발에 차이는, 바람 빠진 가늘고 긴 풍선처럼 흐느적흐느적.

기어이 친정 엄마의 강요로 한약을 먹기 시작했다. 녹용이 든, 산후풍에 좋다는 비싼 약이었다. 한약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었던 내가 하루에 두 번, 잊어버린 날에는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챙겨 먹을 정도로 꼬박꼬박 먹었다. 건강해지고 싶었다. 예전처럼 영민하고 빠릿빠릿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약효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견디신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일도 하고 육아도 하시는 거죠? 지나가는 워킹맘들을 가는 길을 막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다 지나가더라


아이를 낳은 지 100일이 갓 지난 친구에게 '다 지나간다'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러면서 문득. 다른 육아 선배들도 나에게 해 줄 말이란 게 이거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으려던 말을 주어 담았다. 말하면 핑계가 되고, 말하면 응석이 될 테니까. 세상은 예외 없이 잔인하고 냉정한 곳이니까.


그저 참고 견디는 것밖에. 지나가는 하루를 조금씩 견뎌내는 수밖에.


다 지나갈 거니까.


그래  다 지나갈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토닥토닥.


자기 위안과 최면이 이럴 땐 작지 않은 효과를 낸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또 흘렀다.

오늘도 무사히. 무탈히. 흘러가고 있다.

벌써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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