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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Aug 31. 2019

휴가는 시작되었습니다만

설정.

메시지 알림음.

무음.

휴가가 시작되는 바로 그 날, 핸드폰 시계가 00:00이 되자마자 나는 작심한 듯 알림음 설정을 바꿔버렸다.


실시간으로 온라인에 있어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의 근원은 핸드폰이었고, 카톡이었다. 조금이라도 답이 늦으면 어김없이 독촉 전화에 시달렸다.


한 번은 호기롭게 ‘카톡 왔숑’을 알림음으로 설정했다가 애교 섞인 어린아이의 ‘숑’도 미친 듯 반복되면 엄청난 굉음이 된다는 걸 경험한 이후로, 알림음은 최대한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놓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알림으로 해 놓았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여전했다.


연합뉴스가 띠리링 울리며 ‘속보’란 단어를 붙이면 나는 바로 키보드를 두드릴 자세가 되어있어야 했다.


출근 시간 지옥철에서 앞뒤로 압착된 고기 마냥 눌려있었던 그날도 예외일리 없었다. 북한은 미사일을 쐈고, 역시 연합뉴스는 띠리링, 예외 없이 속보를 타진했다.



나는 자동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잘 꺼내지 지도 않는 폰을 억지로 높이 들어 단타를 치기 시작했다.


무력 도발을 일삼는 북한을 규탄...


올해만도 일곱 번째 쓰는 글이니 해야 할 말과 들어가야 할 단어들은 거침없이 술술 나왔다. 그렇다고 쉬운 일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당 대변인 이름을 통해 나가야 하는 공식 논평이었다. 사실 확인도 해야 했고, 비문 체크도 해야 했다.


그러니 글 쓰는 그 순간과 마무리하는 순간, 보고하는 일분일초에는 극한의 긴장감과 조급함이 따라왔다.



“이번 역은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입니다.”



이 와중에 행선지가 귀에 꽂힌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글 쓰는데 정신이 팔려 김포공항까지 갈 뻔했던 지난 수요일의 절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쓰고 지우고 고치기를 몇 번. 이 와중에 핸드폰에 정신 팔려 앞가림도 못하는 나를 향해 출근길 행인들이 모두 혀를 끌끌 차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눈 앞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도

당장 몇 분 안에 뚝딱 문장을 완성해야 했다.


쓰다 걷다가
멈춰 쓰다가



횡단보도 앞에 선 채로 세 번째 파란불까지 보내는 동안 망부석처럼 선 나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어김없이 뒤를 돌아 ‘왜 거리 중간에 서서 문자질을 하고 있느냐’는 짜증을 온몸을 다해 내뿜었다.


한 문장만 더 쓰면 돼.

한 문장만 더.


한 두 발짝만 움직여 옆 구석으로 비켜서면 될 것을 나도 참 그날따라 고집을 부렸더랬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곰 같이 커다란 남자 하나가 어깨를 치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그걸 떨어지기 전에 잡아채겠다고 손을 뻗다가 그만 내 발에 내가 걸려 퍽. 대자로 넘어졌다.



모두가 알겠지만 넘어지는 그 순간은 절대 아프지 않다. 쪽팔림과 당황스러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하지만 난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자. 고. 싶. 다.


적당히 달궈진 아스팔트 위, 따뜻했다.

몇 분 전에  피부처럼 붙어있었던 사각거리는 이불과 폭신한 베개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마음의

0.00001퍼센트 정도만큼이라도 더 간절했다면 아마 난 미친 척 가만히 누워있었을 것이었다.



많이 힘들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에너지가 바닥까지 고갈된 느낌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상황에 휘둘리는

여의도 8년 차

방전이 왔다.






공항 리무진에 올랐다.



처음으로 핸드폰 유심을 사지 않았다.

익숙한 상황에서 완전히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어느 것에도 쫓기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시간을 보내보리라.


부디 이 귀한 시간 동안

소모되고 상처 받았던 나를 조금이라도

꺼내 들여다보고 바라 볼 기회가 되었으면.


오롯이 나만을 위한 나만을 생각하는

여행이

시작되기를.





비행기에 올라

읽지 않은 999 카톡 메시지를 뿌듯해하며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꿀 찰나

보지 말아야 할 이름 두 자가 눈에 꽂혔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지.


순수하고도 완벽히 탈출한,

자유롭고 편안한 휴가는 무슨.


지상 낙원이라던 휴가지에서

나는 그에 대해 떠올려야만 했다.


역시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아임 프롬 사우스 코리아를 말할 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렸다.

나의 祖國은 曺國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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