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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강 Aug 22. 2020

백산수팀과 삼다수팀

오늘도 살짝살짝 박스를 돌리며 물을 받았다

남편은 보살사의 물이 좋다며 언제부턴가 생수를 떠 오기 시작했다. 2주일 전 오랜만에 함께 물 뜨러 갔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 잠시 보살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니 우리뿐이다. 물통 박스를 내리고 물을 받기 시작하는데 연세 지긋한 아저씨 한 분이 오셨다. 순서를 기다리며 남편이 물 받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시더니 허허 웃으시며


 "요건 백산수팀, 저건 삼다수팀이네요." 하셨다.

표현이 재미있어 우리 집 물통 박스를 쳐다보니 하늘색과 흰색 뚜껑 병들이 박스 두 개에 나뉘어 있었다. 남편은 1.8L 병이 아홉 개 들어가는 박스 두 개에 물을 길어오는데 하나는 하늘색 뚜껑 백산수 물병들을 또 하나에는 흰색 뚜껑 삼다수 물병들을 넣어둔 것을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답다 생각하며 남편이 물을 채우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먼저 뚜껑을 다 열어 약수터용 파란색 국자에 넣어 두고 물병을 담은 채 박스만 살짝살짝 돌리며 물을 조금씩 받는다. 한 바퀴 다 돌려 아홉 개에 씻을 물을 다 받으면 물병 하나를 깨끗이 흔들어 씻은 후에 먹을 물을 채우기 시작하고 다 채울 동안 나머지 물병을 씻는다.

물을 채울 때에도 물병을 들거나 하지 않고 박스만 살짝 돌려줄 뿐이다. 물이 한 병씩 채워지면 국자에 씻어 둔 뚜껑을 하나씩 닫아간다.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있는 물병을 바깥쪽 물병과 위치를 바꿔주어 물을 채우기 시작하자 과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아저씨가 한 마디 더 하셨다.

"안 그래도 가운데는 어떻게 하나 궁금했는데 허~허~ 그렇게 바꾸면 되는군요. 참 효율적으로 일을 하시네요. 나도 박스 한 번 구해서 그렇게 해봐야겠어요." 하셨다.

남편이 늘 하는 방식이라 나는 별생각 없이 바라봤는데 아저씨의 말을 듣고 보니 물도 절약하고 시간도 아낄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동선과 순서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처리하면 훨씬 효율적이다. 사용할 용구를 배치할 때도 되도록 움직임이 덜 하도록 하고, 일의 순서도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적절하게 구분하면 시간도 아끼고 실수도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남편의 일상을 살펴보면 체계적이고 능률적으로 일 할 때가 많다. 사용한 물건은 항상 있었던 자리에 두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가까이에, 가끔씩 사용하는 것은 깊숙이 넣어두는 등 작은 것이지만 세심하게 처리하고 실천한다. 남편에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설거지 후 그릇과 냄비를 엎는 것이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포개지 말고 비스듬하게 세워두면 물 빠짐과 건조를 빨리할 수 있잖아. 냄비를 뒤집어놓을 때도 공기가 통하게 밖으로 좀 빼서 걸쳐두면 물기를 빨리 마르게 할 수 있어."

주부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때는 마음이 상해 투덜대기도 하지만 듣고 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남의 일상을 유심히 살펴보고 장점을 발견해낸 아저씨의 관찰력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변화를 원한다 해도 자기 스스로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주변의 남모르는 사람인데도 좋은 점을 찾아내고 배우겠다는 아저씨의 열린 태도가 인상 깊었다. 아저씨는 남편의 물병 박스를 벤치마킹해서 다음엔 더 쉽게 물을 길어갈 것이다.



오늘은 일요일, 청소를 한 후에 다시 물을 뜨러 갔다. 아주머니 한 분이 물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나 살펴보니 쪼그리고 앉아 한 병씩 한 병씩 수도꼭지에 물병을 대고 다 받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꼼짝도 못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남편의 백산수팀과 삼다수팀의 활약이 오늘도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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