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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꿍꿍이 많은 직장인 Dec 13. 2020

#23. 시골 고향과 제조업의 상관관계

시골 고향과 제조업의 상관관계

나는 87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예천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90년대, 내가 자란 예천군 노하리 참 살기 좋은 동네였다. 동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골목길에서 축구를 했고, 여름엔 근처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곤 했다. 그리고 같은 마을 어른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함께 모여 술 한잔 기울이면서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90대, 2000년대까지 부모님이 하시던 옷가게, 신발가게는 장사가 꽤 괜찮게 됐었다. 마감 후, 만 원짜리를 세던 부모님 옆에서 이제 막 숫자를 깨친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면서 함께 숫자를 세곤 했다. '하나, 둘, 셋넷... 서른' 아마도 하루에 20~30만 원씩은 매출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싯적 우리 마을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났고 열심히 살면 되는구나 하는 희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샌가 하나둘씩 사람이 떠났고, 10년 정도 전부터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타지 생활을 하던 나는 고향에 올 때마다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게 많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전 추석에는 참 놀랐던 적이 있다.


건물 2층에 있던 많은 술집들이 다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래도 명절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던 동네였는데 그 마저도 이젠 없었고, 그 많던 술집들이 대부분 사라졌던 것이다. 그나마 1층에 남아있던 상가는 계속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건물 2층에 있던 많은 상가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다 사라져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어머니께선 여성 수제화 구두가게를 운영하고 계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신발가게 주변에는 새로운 신발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선 상도덕이 없다그런 사람들을 조금은 원망하시곤 했다. 나도 당시엔 참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입장에선 먹고사는 게 먼저지 상도덕은 그다음이 아니었나 싶다. 고상한 말로 표현하자면 직종의 진입장벽이 낮은 탓이었다.


그렇게 길거리에 사람은 줄어들고, 경쟁하는 가게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큰 주변 도시의 아웃렛이나 백화점은 더 화려해졌고, 인터넷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그렇게 시대가 빠르게 변해감에 따라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몫은 빠르게 줄어갔다.

  

어머니께선 정말 한결같이 열심히 사신다. 젊은 날에 그렇게 고생하신 덕에 작은 건물 하나를 소유하고 계시고, 곧 연금이 나오시니 노후에도 어떻게 생활이 가능한 정도는 될 것 같다. 몇 년 뒤에도 우리 건물에 세가 지금처럼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유지만 된다면 생활할 정도는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부모님께선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만큼 정말 잘 살고 계신지, 괜찮다고 하시는 게 정말 괜찮으신 건지, 그리고 세월이 더 흐르고 나서도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으실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런 시대의 흐름이 우리나라 제조업이 처해있는 상황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 전체 제조업이라고 하기엔 비약이 지나칠 수 있으니 그냥 지금 다니는 화학 제조업 회사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겠다.




2015년 1월 1일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그룹이었고, 그 그룹의 한 화학회사에 입사했다. 삼성'전자'가 아니라 삼성'후자'같은 회사였지만 그래도 뭐, 대기업이니깐...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고 다녔다.


나의 첫 부서는 '힘들다'라고 소문났었고, 그 정도는 아니길 기도했지만... 내가 상상한 최악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들었다. 극강의 스트레스가 몇 년간 누적되면 몸이 어떻게 급속도로 망가지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그렇게 몸 상해가며 회사를 다녔고, 그 노력에 대한 평가는 항상 '보통'이었다. 그리고 회사의 연봉 인상률은 항상 1%대 전/후였다. 신발가게에 빗대어 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고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럼에도 월급이 높지 않은 이유가 쉽게 이해가 된다.


우선 화학업종 자체가 지금 시대에서는 진입장벽이 높은 사업이 아니다. 보통 진입장벽이 낮은 업종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높은 곳으로 몰린다. 그렇게 결국엔 승자독식으로 가게 된다. 신발 같은 의류를 살 때 우리는 싸게 인터넷으로 사거나 같은 Maker의 옷이라도 백화점이나 아웃렛을 간다. 싸게 살 거면 제일 싼 게 좋고, 좋은 것을 살 거면 품질과 서비스가 좋은 곳에서 사고 싶은 게 인간 본성이다. 아마도 싼 맛에 사는 건 중국, 좋은 회사는 미국/혹은 다른 선진국의 기업이 될 것 같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근거로 어떤 자료를 가지고 올 필요도 없다. 외부인 입/출시에 폰 단속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술력이 높은 직종이 아니라는 근거고, 나날이 쌓여가는 재고가 주변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경쟁업체에 밀리는 상황이니 버는 돈 자체가 늘어나기 어렵다.


국내적으로는 환경을 포함한 각종 규제가 심해지고 있다. 환경규제가 심해진다는 말은 사업영위를 위한 정화설비를 추가적으로 설치해야 하거나 근거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회사 자체가 이미 40년 이상이 되어 삐그덕 대는 설비는 늘어나는데 규제는 심해지니 추가적으로 설비를 더 설치해야 한다. 그렇게 회사는 직원에게 추가로 시키는 일은 많아지고, 들어가는 비용은 줄이라고 강요한다.


현상 유지만 해도 하는 일이 많은데 거기에 추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늘어나고, 나날이 인건비나 물가는 오르는데 집행하는 비용은 규제를 하니 실무자는 스트레스로 죽어나간다.


중요한 건 노력한다고 스트레스받는다고 회사가 그 노력과 희생을 알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열심히 할수록 나의 삶은 더 무너져 간다는 것이다 (골병이 드니깐). 회사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일궈놓은 기반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일 테니 직원에게 나누어주는 것에 박할 수 밖엔 없다. 직원은 무리해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열심히 해도 나아지는 건 없으니 대충 하게 된다. 그렇게 상황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80년대, 90년대생은 그렇게... 회사생활에 대한 의미와 희망이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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