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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꿍꿍이 많은 직장인 Dec 31. 2020

#27. 제조업에서 혁신 찾기

옆 부서에서 있었던 일이다.


담당 임원분은 항상 새로운 것, 도전적인 활동에 대해 많이 생각하시는데, 그분의 생각으로 탄생한 활동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실장님이 주제를 던지면 팀원은 거기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어서 제출한다. 각자의 글은 익명으로 서로 공유되며 투표를 통해 선별된 5명의 우수 글 작성자는 소정의 상품을 받게 된다.


한 날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옆 부서 후임이 축 쳐져서는 나를 찾아왔다. 글을 참 열심히 써서 제출했는데 '출제자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며 반려됐다는 것이다. 그 뒤로부터는 실장님께 글쓰기 자료를 제출하기 전에 팀장님 선에서 글을 수정하라는 Feed back을 주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되었다. 이유는 '실장님이 이런 식으로 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지적 소양을 기르고 다양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글쓰기'라는 멋진 활동이 똥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제조업에서 혁신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조업에 6년 이상 근무하며 내가 느낀 점은 '제조업은 혁신이 크게 요구되는 산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사업 구조를 생각해 보면 한층 더 이해하기 쉽다. 제조업은 주로 수요자의 물량 요청(혹은 예상) > 공장에서 제조 > 판매로 이어진다. 공장은 수용할 수 있는 Max Capa가 정해져 있으며, 그 Capa 안에서 수요자가 요청한 물량과 납기를 어떻게 정확히 이행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선임들은 이미 그런 활동을 더 많이 경험했고, 그들만의 대처 방정식이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서 '혹시나'하는 가능성을 유발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해왔던 승리 방정식을 대입할 때가 많다. 요컨대. 대부분의 관점이 '경험'과 '과거'에 머물러 있다. '경험'과 '과거'라는 가치를 비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선임들의 '경험'과 '과거'에는 오히려 배울 점이 많다. 요는, 그냥 산업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산업 특성 안에서 '혁신'이나 '집단지성'같은 것들은 크게 필요한 가치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하는'회의'나 '보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하고 있는 회의는 '집단지성'을 모으는 자리일까 '집단 공감'을 강요하는 자리일까.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좀 더 좋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 보고자료를 만드는 걸까 책잡히지 않기 위해 보고자료를 만드는 것일까. 나의 회사생활은 모두 후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아오며 끝까지 버틴 사람이 지금의 임원/팀장 자리에 있다. 과연 그분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기를 원하실까 자신의 의견을 이해해주기를 원하실까. 그분들은 과연 혁신적인 보고를 원하실까 책잡히지 않는 보고를 원하실까. 아마도 10명 중 9명은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이런 환경 특성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회사가 혁신적이지 못하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임원이 혁신하지 않는다고 탓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고 배울 점만 추려서 수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이롭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이고 나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이다.   


회사에 혁신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 또한 과거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혁신을 멈추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국 오롯이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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